김수영은 1954년에 탈고한 「구슬픈 육체」에서 개인과 민족 사이의 갈등을 제시한다. 화자는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서 다시 일어났다고 하면서, 다시 불을 켜고 앉아 있으면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다고 말한다. 이것은 밤의 시간에 “내가 찾던 것”을 만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의 시간에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서 다시 일어났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밤에 찾던 것은 “아름다운 통각(統覺)과 조화와 영원과 귀결”을 가리킨다. 그는 어둠 속에서 “청춘”, “대지(大地)” 등의 초월적인 정신이 “몸”과 “일체(一體)”가 되기를 원하는 “불굴의 의지”를 다진다. 밤의 시간에는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잊어지지 않는 것”은 현실적인 낮의 “귀중한 생활”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마지막에는 “해저의 풀떨기같이” 무감각하게 될지라도 현실의 물질적인 “생활”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귀중한 것이라는 말이다.
결국 그가 밤에 찾던 것이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난 이유는 현실적인 시간인 낮에 돈을 벌기 위해 뛰어다니는 생활이 절대로 잊을 수 없이 귀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밤의 시간에 “천상(天上)”의 가치를 추구하다 “잊어버린 생활”을 되찾기 위해 다시 불을 켠 것이다.
그는 초월적인 조화를 원하는 가슴으로 조화가 없어서 아름다운 현실 생활을 찾아서는 안 되므로 현실적인 생활을 “해 지자 헤어진 구슬픈 벗”처럼 여기고 “천사(天使)”처럼 흘려버려야 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천사와 달리 인간은 “쉴사이 없이 가야 하는 몸”, “구슬픈 육체”를 가진 존재이므로 불을 켤 수밖에 없다고 한탄한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천사와 달리 현실 생활을 부정할 수 없는 슬픈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그는 「토끼」에서 먹고살기 위해 뛰는 훈련을 받아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제시한 것처럼 여기서도 쉴 새 없이 가야 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간의 운명으로 다시 강조하고 있다.
물론 그가 초월적 정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시의 앞부분에서 밤마다 “아름다운 통각(統覺)과 조화와 영원과 귀결”을 찾고, 어둠 속에서 “청춘”, “대지(大地)” 등의 초월적인 정신이 “몸”과 “일체(一體)”가 되기를 원하는 “불굴의 의지”를 다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밤의 시간에는 영혼을 위해 민족적 정신을 추구하다가도 낮의 시간에는 육체를 위해 개인적 생활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다원주의적 사유를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을 모두 가진 다원적 존재이므로 생활과 정신, 문명과 전통,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구슬픈 육체」(1954)
불을 끄고 누웠다가
잊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
다시 일어났다
암만해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 있어 다시 불을 켜고 앉았을 때는 이미 내가 찾던 것은 없어졌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