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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주 Feb 12. 2023

다원주의자 김수영 : 거리1

김수영은 1955년에 탈고한 「거리1」에서 자본주의 문명을 상징하는 도시를 정신적인 공간으로 바꾸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화자는 오래만에 “거리”에 나와서 빈 “사무실”에 있는 물건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도회의 중심지”에서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이 “태연”하게 앉아 있다. 이렇게 그가 도시의 한복판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일이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을 끌고 가는 것이다”, “일을 끌고 가는 것은 나다”라는 주체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헌 옷과 낡은 구두”가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끼면서도 이러한 현실 생활의 문제보다는 “옛날에 죽은 친구”, 즉 인간의 ‘죽음’이라는 존재의 문제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벽” 위에 걸려 있는 “지도”가 푸르다고 하면서, 현실적인 생활의 벽을 넘어서, “푸른 바다와 산과 들”, “화려한 태양”으로 상징되는 초월적인 정신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는 초월적인 “구름”이나 “항구”가 없는 현실적인 사무실의 “허연 석회 천정”을 “꿈이 아닌 꿈”을 가리키는 “내일의 지도”로 여긴다. 그리고 “가옥과 집물과 사람들의 음성과 거리의 소리들”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문명을 점묘파 화가 “쇠라”가 세상을 점으로 그린 것처럼 초월적인 정신을 상징하는 “해양”의 한구석을 차지하는 “조그마한 물방울”로 그리는  “선비” 같은 시인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자본주의 시대 물질문명의 한복판인 “거리”를 바다처럼 정신적인 공간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그가 1955년의 산문〈생명의 향수를 찾아〉에서 타이티로 떠난 화가 고갱과 달리 자본주의 문명 한복판에서 이과 대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뒷받침된다. 그는 6·25 이후 우리가 고갱처럼 파괴적인 도시문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신적으로는 이미 타이티를 향해 출발하였지만, 가냘픈 육체만이 아직 폐허 사이를 배회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자신은 현실을 벗어난 타이티 대신에 자본주의 문명의 한복판인 “서울의 뒷골목”에서 “생명의 향수를 그리고 고민하면서 일체의 허위와 문명의 폐단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고귀한 정신”(228)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이 시에서도 그는 시인으로서 물질문명의 한복판인 도시의 거리를 정신적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예술 의지와 “시작(詩作) 방향”를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하면서도 이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사회주의의 길이 아니라, 현실적 생활난 해결을 위해 자본주의 문명을 적극 수용하면서 이로 인한 물질만능주의의 폐해를 초월적 정신으로 극복하려는 다원주의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거리1」(1955)

     

오래간만에 거리에 나와 보니

나의 눈을 흡수하는 모든 물건

그중에도

빈 사무실에 놓인 무심한

집물 이것저것     


누가 찾아오지나 않을까 망설이면서

앉아있는 마음

여기는 도회의 중심지

고개를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이

태연하다

―일은 나를 부르는 듯이

내가 일 위에 앉아 있는 듯이

그러나 필경 내가 일을 끌고 가는 것이다

일을 끌고 가는 것은 나다     


헌 옷과 낡은 구두가 그리 모양수통하지 않다 느끼면서

나는 옛날에 죽은 친구를

잠시 생각한다     


벽 위에 걸어 놓은 지도가

한없이 푸르다

이 푸른 바다와 산과 들 위에

화려한 태양이 날개를 펴고 걸어가는 것이다     


구름도 필요 없고

항구가 없어도 아쉽지 않은

내가 바로 바라다보는

저 허연 석회천정―

저것도

꿈이 아닌 꿈을 가리키는

내일의 지도다     


쇠라여

너는 이 세상을 점(點)으로 가리켰지만

나는

나의 눈을 찌르는 이 따가운 가옥과

집물과 사람들의 음성과 거리의 소리들을

커다란 해양의 한 구석을 차지하는

조그마한 물방울로

그려보려 하는데

차라리 어떠할까

―이것은 구차한 선비의 보잘것없는 일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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