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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주 Feb 13. 2023

다원주의자 김수영 : 바뀌어진 지평선


다원주의자 김수영 : 바뀌어진 지평선


김수영은 1956년에 탈고한 「바뀌어진 지평선」에서도 자본주의 시대 물질과 정신, 돈과 예술 사이의 갈등을 제시하고 있다. 화자는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시대에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경박성”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예술의 신인 “뮤즈”에게 용서를 빈다. 현실적인 생활난에 빠져서 울지 않으려면 잠시 뮤즈를 잊고, 영화배우 “로날드 콜맨”과 “피우기 싫은 담배” 등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경박한 현실 생활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로널드 콜맨(Ronald Colman)은 이 시의 제목과 유사한 1937년의 영화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의 주연 배우이다. 이 영화에서 ‘잃어버린 지평선’은 주인공이 우연히 유토피아인 샹그릴라에 갔다가 다시 떠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시에서 ‘바뀌어진 지평선’은 기존의 뮤즈(유토피아)만을 추구하다가 뮤즈와 인간이 나란히 걸어가는 다원주의로 지평선이 바뀌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현실 생활 속에서 “매춘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지만, “날개 돋친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뮤즈와 같이 걸어간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속지 않고 걸어가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정서인 “우울”이 또한 필요하다고 하면서, 현실 생활을 상징하는 “담배”를 끊고 현실 생활에 빠져 있는 누구에게든 신경질을 피우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여전히 뮤즈를 추구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영화에서처럼 정신적인 세계를 잃어버리고 물질문명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문명을 모두 긍정하면서 양극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적으로 삼는 “공리주의(功利主義)적인 인간”이 아니라고 하면서,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한 생활”, 즉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자신의 생활이 비겁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대에는 “지혜의 왕자”처럼 도사리고 앉아서 “원죄와 회한”만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와 남, 즉 모든 인간이 괴롭게 살아가는 물질적 생활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고 다시 강조한다.


그는 특히 “타락한 오늘”의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클라크 게이블”이 나오는 대중영화, “너절한 대중잡지” 속으로 더 깊이 떨어져야 하지만, 사람들이 비웃을 것 같아서 적당히 “넥타이”를 매고 앉아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뮤즈는 “어제까지” 자신의 세력이었지만 오늘은 지평선이 바뀌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타락한 신문기자”의 탈을 쓰고 살고 있다고 덧붙인다. 어제까지는 시인으로서 뮤즈만을 추구했지만, 오늘부터는 돈을 벌기 위해서 신문기자라는 직업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의 후반부에서도 그는 “투기(妬忌)와 경쟁과 살인과 간음과 사기”가 가득한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고 거듭 말한다. 그리고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처럼 “아슬아슬하게 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을 제시한다. 이것은 자신이 진정 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나 세상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정신, 돈과 예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긴장과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시인으로서 뮤즈를 “배반”하고, 뮤즈와 인간 사이에서 긴장을 추구하려는 “모험”을 하는 자신의 “간악”함이 무서워지지만, 이것은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뮤즈에게도 “복부”를 하늘을 보게 하면서 “표면”에 살라고 주문한다. 그렇게 하면 “어제부터 출발”했던 과거의 “아름다움”과 “오늘부터 출발”하는 현재의 “육체”를 모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처럼 신문기자로서의 육체적 생활과 시인으로서의 정신적 예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긴장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돈을 상징하는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 매리지, 하우스펠 에어리어”와 초월적 예술을 상징하는 “고갱, 녹턴 그리고 물새”를 대립시킨다. 그리고 뮤즈에게 시인이 "시"의 뒤를 따라가기에 싫증이 났다고 하면서, 과거처럼 초월적인 예술만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는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자신의 새로운 목표로 제시한다. 이를 위해서 이미 “어제부터 출발”했던 뮤즈는 걸음을 멈추고, 현실을 외면하면서 아직 출발하지 않은 “서정시인”은 조금 빨리 가서 대열을 “일자(一字)”로 만들자고 권유한다.


마지막 연에서 인간들이 현실적인 “사과”, “수첩”, “담배”와 함께 걸어간다고 하면서, 뮤즈에게 “앞장을 서지 마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오늘의 우울을 위하여”, “오늘의 경박을 위하여” “너의 노래의 음계를 조금만 낮추어라”라고 주문한다.


결국 이 시의 제목인 ‘바뀌어진 지평선’은 뮤즈의 정신적인 예술만 추구하던 것에서 자본주의 시대 육체적 생활을 긍정하며 인간과 뮤즈가 ‘모두 다 같이 나가는’ 균형을 추구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시는 자본주의 시대에 “생활, 혹은 세상의 논리와 예술의 논리를 하나로 아우르려는 그의 안간힘”이나, 뮤즈와 인간, 돈과 예술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려는 다원주의적 의지를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현실적인 육체는 「구슬픈 육체」에서처럼 흘려버려야 할 “구슬픈 육체”가 아니라, 뮤즈와 당당하게 같이 걸어가야 하는 긍정적인 대상으로 변모한 것이다.


***


「바뀌어진 지평선」(1956)     


뮤우즈여

용서하라

생활을 하여 나가기 위하여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단다

시간의 표면에

물방울을 풍기어가며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

로날드 골맨의 신작품을

눈여겨 살펴보며

피우기 싫은 담배를 피워 본다     


어느 매춘부의 생활같이

다소곳한 분위기 안에서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날개 돋친 마음을 위하여 너와 같이 걸어간다


흐린 봄철 어느 오후의 무거운 일기(日氣)처럼

그만한

우울이 또한 필요하다

세상을 속지 않고 걸어가기 위하여

나는 담배를 끄고

누구에게든지 신경질을 피우고 싶다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한

생활이 비겁하다고 경멸(輕蔑)하지 말아라

뮤우즈여

나는 공리적인 인간이 아니다

내가 괴로워하기보다도

남이 괴로워하는 양을 보기 위하여서도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한 것이다

지혜의 왕자처럼

눈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도사리고 앉아서

나의 원죄와 회한을 생각하기 전에

너의 생리부터 해부하여 보아야겠다

뮤즈여     


클락 게이블

그리고 너절한 대중잡지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

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웃을까 보아

나는 적당히 넥타이를 고쳐 매고 앉아 있다

뮤우즈여

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세력

오늘은 나의 지평선이 바뀌어졌다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일 것이지만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

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     


솔직한 고백을 싫어하는

뮤즈여

투기(妬忌)와 경쟁과 살인과 간음과 사기에 대하여서는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적당한 음모는 세상의 것이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

아슬아슬하게

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이여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

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표면에 살아라

뮤즈여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그러면

아름다움은 어제부터 출발하고

나의 육체는

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콜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

매리지,

하우스펠 에어리어

―(영국인들은 호스피탈 에어리어?)     


뮤즈여

시인(詩人)이 시(詩)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고갱, 녹턴 그리고

물새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뮤우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

서정시인(抒情詩人)들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

그러면 대열(隊列)은 일자(一字)가 된다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

인간들이 걸어간다

뮤즈여

앞장을 서지 마라

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를 조금만

낮추어라

오늘의 우울을 위하여

오늘의 경박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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