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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주 Feb 19. 2023

민족주의자 김수영 : 너를 잃고

김수영은 1953년에 탈고한「너를 잃고」에서 개인과 민족 사이의 갈등을 제시한다. 화자는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 억만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 억만 걸음 떨어져있는 / 너는 억만개의 모욕이다”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늬”는 없으면 내가 서러워지는 것이고, 나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김수영의 전기적 사실을 근거로 해서 ‘늬’를 아내 김현경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시는 아내의 배신으로 인한 “가슴이 미어지는 모욕”이 아니라, 전쟁 직후 아내로 대표되는 가족과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겪고 있는 민족 사이의 갈등 문제를 던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가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자연적인 “꽃”이나 우주적 존재인 “별”을 등에 지고 앉아서, “모래알” 같이 메마른 현실 속에서 찾았다는 것은 바로 아내로 대표되는 가족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인제”부터 “늬가 없어도 산단다”라고 말하는 것은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가족의 사랑이 아니라, 자연적이고 우주적인 민족의 사랑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가장으로서 가족에 대한 사랑과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억만개의 모욕”을 받을 만한 일이지만, 지금은 이를 감수하면서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민족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추구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는 ‘너=아내=가족’ 없이 사는 삶이 “보람”이 있기 위해서 “돈”을 벌지 않고,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고 말한다.  제목인 "늬가 없어도 산단다"라는 말은 돈을 벌겠다는 것이나 다른 여자를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생활의 원주(圓周)” 위에 “어느 날이고” ‘너’가 서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자신이 바라는 것은 개인적인 가족의 사랑을 넘어서 “애정의 원주”가 위대해지는 민족의 사랑으로 확대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가족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민족에 대한 위대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가 ‘너’로 인해 “공허한” 생활의 원주가 찬란해지면 그때는 다시 “다른 유성”을 향해 달아나면서 “영원한 숨바꼭질”을 한다고 말하는 것도 자신이 가족을 완전히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애정의 원주를 가족에서 민족으로 그리고 인류로 확대해 나가는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개인적인 사랑과 전체적인 사랑 사이에서 영원히 숨바꼭질하듯이 긴장과 균형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그가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라고 말하는 것도 가족과 민족 사이의 숨바꼭질이 끝나서 ‘가족=민족’의 등식이 성립하는 “세계정부 이상(理想)”(「4·19 시」)을 추구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이기적인 가족을 넘어서 위대한 민족으로 애정의 원주를 확대하는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서 ‘너=아내=가족’ 없이 살아야 하는 “억만무려(億萬無慮)의 모욕(侮辱)”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드러내면서 시를 마무리한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해 돈만 버는 이기적 사랑보다는 민족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것이다.   


김수영이 시작(詩作) 초기인 이 시에서부터 후기의 「거대한 뿌리」에 이르기까지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는 「나의 가족」이나 「여름 아침」 등에서는 개인적인 가족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자이기도 하다. 김수영은 개인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긴장을 추구했던 다원주의자이다. 


너를 잃고」(1953)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 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 있는

너는 억만 개의 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 있기 위하여 

나는 돈을 벌지 않고

늬가 주는 모욕의 억만 배의 모욕을 사기를 좋아하고

억만 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나의 생활의 원주(圓周) 위에 어느 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리하여 이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 하나 다른 유성(遊星)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히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억만무려(億萬無慮)의 모욕인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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