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nning in Africa
이번 러닝을 도와줄 칼과 우리가 설정한 여행의 방식은 뚜렷했다. 차에 짐을 놓고 맨몸으로 뛴다. 하루에 2~30km 정도 뛴 후 끝난 자리에서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거나 가까운 숙소로 이동하여 숙박을 한다. 그리고선 다음날 다시 끝난 자리로 돌아와 2~30km를 뛰는 것. 그것이 이번 새로운 여행의 방법론인 동시에 2주간의 루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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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에 필요한 물품, 식량을 산 후 이어진 자그마한 회의가 이어졌다. 최종 목적지는 명확했다. 애초에 칼은 다르에스살람에서 약 180km의 거리에 위치해있는 모로고로 산을 목적지로 점찍었다. 2주 정도면 뛰어서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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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최소 20km, 두 자릿수의 km가 내게 주는 압박감이 상당하다. 뛸 수 있을까. 한국에서 운동 삼아 하루 5km를 매일 뛰긴 했으나 갑자기, 그것도 매일 20km를 뛴다는 것은 큰 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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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짓누르는 압박감에는 아프리카가 가진 미지의 이미지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5개월간 아프리카에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흔히 다들 하는 여행 루트 선상이었다. 그 위에서 감히 벗어나지도, 벗어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프리카라는 단어는 혀를 굴리기만 해도 떨려오는 맛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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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걱정을 한 아름 안고 도착한 바가모요는 내 속과는 반대로 차분하고 정감 가는 마을이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꼬마가 길게 내지른 공이 또르르 도로를 침범해 차가 멈추기 일쑤였고 정비 안 된 비탈길과 회색 집들, 찌그러진 페트병 사이로 황금빛의 고양이들이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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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닉처럼 맨발로 러닝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맨발 러닝에 대하여 실질적인 조언을 해줄 있는 닉도 있었고 러닝메이트 칼도 있겠다, 나의 협소한 여행의 폭을 넓혀볼 이만한 기회가 없었다. 또한 궁금하기도 했다. 맨발로 밟는 아프리카, 맨발 이상의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까? 사랑을 위해 뛴다는, 어처구니가 없는 닉의 여행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가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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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가치를 쫓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 중엔 일반적인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가히 지구에 기생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무의미한 존재들도 더러 있었다. 예술과 꿈, 평화 등으로 포장된 목표를 성실하게 쫓았지만 기생충들의 목표란 본디 기이하고 터무니없기 마련, 그들의 꼴이 사기꾼과 겹쳐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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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로선 그들의 행동이 굉장히 무의미하게 느껴졌기에 나는 기생충들을 한심하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여행이 주는 특권적인 순간들을 통해 기생충들의 목표와 가치들, 그 속에 내재된 의미들을 직접 마주할 수 있었는데 예로 쿠웨이트 시티의 유리 거울집 주인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것에 평생을 바칠 수도 있다는 사라예보의 춤꾼에게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더반의 무티 마켓, 아테네의 사창가에서 체감한 가치들은 나의 가치관 형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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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보면 당시에 쓰잘데기없다고 여겼던 기생충의 가치들은 나의 삶을 더욱 다채롭고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목표에 내가 100% 공감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평소에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들에 대한 나의 독선적인 반응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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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이번 맨발 러닝 역시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나에게는 이 짓거리도 기생충의 행동과 별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나는 보다 쉬이 신발을 벗어던지고 닉의 맨발 여행에 동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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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맨발을 아프리카에 내디뎠다. 소금기를 머금은 공기가 코 안을 가득 채운다. 한 움큼 들이마시니 독한 페퍼민트 차를 마신 듯 몸이 기민해진다.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과격할 정도의 파격을 맨발이 견딜 만큼만 받아들인다. 계속해서 천천히, 나는 주변의 것들과 점차 유대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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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예상과는 달리 도로는 꽤나 잘 정비되어있었다. 바닥 벽돌이 여기저기 파이고 유리 부스러기와 돌부리가 곳곳에 있었지만 길이란 구색을 갖추는데 무리가 없었다. 오히려 아스팔트의 경우 그 어느 도시보다 매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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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상태로 밟는 아프리카는 내가 5개월간 밟아왔던 아프리카와는 완전하게 달랐다. 뛴 지 단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전의 나에게 바가모요라는 동네가 특징 없는 아프리카의 흔한 동네였다면 맨발로 뛰는 나에게 바가모요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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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신발을 벗고 뛰는 것뿐인데 이전과 너무나도 달라 우스웠다. 단순한 선택 하나로 모든 것들이 모조리 뒤바뀐 것이다. 완전히 변신한 여행에 적응해나가는 내가 너무 천연덕스러워 피식 웃음이 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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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리하지 않고 땀이 살짝 날 정도에서 러닝을 마무리했다. 공식적 첫 러닝은 아니었지만 산뜻한 출발이었다. 온몸에 초록색 피가 도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약 3km를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