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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기환 Mar 30. 2020

N번방과 N번방 이전


<Sébastien Thibault>


  성범죄, 영상과 관련된 사건이 연일 뉴스를 장식한다.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성의 목소리를 높인다. 밝혀지는 면면들에 어떤 교수는 인터넷 규제 강화, 어떤 기자는 경찰 유착을 의심하며 수사 강화를 주장한다. 국가의 수장까지 나서 검경의 직을 걸고 사건들에 강경한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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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S는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개인들은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기 바쁘다. 누구는 비판과 비난을, 누구는 방관과 의심을 토해낸다. 저마다 원인을 진단한다. 소라넷, 윤리교육, 메시지 모니터링으로 수렴하는 칼럼과 댓글들이 순식간에 페이지를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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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나는 의문이다. 그간의 범죄들을 신문 헤드라인에서 소비되는 명칭들만의 문제로 단순하게 타자화 시킬 수 있는 것인가? 그것도 저렇게 쉽게, 나는 진심으로 의문이 든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본인을 도덕의 자리에, 그들을 악의 자리에 치환해 넣는 시대의식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 오히려 그러한 자연스러운 ‘반성 없음’에 욕지기를 느낀 것이 솔직한 필자의 감상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소시오패스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친구이지만 알고 보니 일반 사람들과 달리 비정상적이며 사회정신적인 부분에서 큰 결함이 있었다고 한다. 또 누군가는 그들이 공인이기에 잘못했다고 말한다. 나는 그들에게 묻는다. 정의도 모호한 공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해야 하는 것인가? 단순히 누군가가 돈이 많다고, 누군가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다고,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는 이유로 그들의 도덕성이 높아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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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반대로 나는 그들보다 돈이 많지 않으니까, 나는 그들보다 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않으니까, 나 역시도 어느 부분에서는 일정 정상적이지 않으니까, ‘나’는 도덕적이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도덕성이라는 것은 사회, 재산 소유의 고하를 막론하고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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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해서 이어지는 의문, 위의 치환이 일체의 반성을 동반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날 선 칼날이 향하는 부분이 아니라 그 칼의 손잡이를 쥔 도덕의 자리가 우리의 자리라는 환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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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는 예상외로 분명하다. 바로 우리 모두가 하등의 반성도 없이, 일체의 의식도 못한 채 쾌락의 시공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지탱하는 포석에 쾌락이라는 가치를 필연적인 것으로 세긴 후 재밌으니까, 웃기니까, 그것이 말초신경을 자극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태도, 바로 ‘사유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지금 우리는 이곳까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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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사회문제는 단언컨대 각 개인의 견본들이 합쳐진 것이다. 그들을 철저히 타자화 시키고 정의의 자리에 아무렇지 않게 본인을 끼워 넣어 반성하지 않게 만드는 도식이 우리를 이곳까지 이끌었으며 반대로 그들을 저곳까지 가는 것이 가능케 만들었다. 판치는 위선과 자기모순들. 벌레는 원래 웅덩이가 썩을수록 들끓는 법이다.



맘몬 : 7대 죄악 중 탐욕을 상징하는 악마. 맘몬은 사람들에게 금전욕을 심어주는 악마다.


  소비사회는 소비로 돌아간다. 소비의 상아탑 위에는 맘몬이 버젓이 앉아있다. 그 소비를 움직이는 것은 쾌락이다. 그 아래서 개인은 현대사회를 성전 삼아 소비라는 예배로 맘몬을 신봉하고 그것이 배설하는 시뮬라크르를 먹고살기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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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쾌락의 하렘에선 모든 것이 쾌와 불쾌로만 계산된다. 그곳에서 다른 가치는 물론 한 조각의 자성도 발 디딜 자리가 없다. 사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육체적 열광이 모든 정신적 규범에 앞선다. 비약이라고 느껴지는가, 우리가 지금 사는 사회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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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의 교묘한 수사와 소비사회 세계관 안에서 사람들은 쾌락의 논리에 희롱당한다. 하지만 자신이 즐거이 모시는 신이 맘몬임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쾌락과 계약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소비 수요에 따른 '생산’ 과정에 맹목적으로 참여하며 밀도 높은 쾌락의 윤회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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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찰 없이 쾌락을 추구한 것은 누구도 아닌 우리가 ‘자발적’으로 해온 것이다. IMF 이후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며 신의 자리를 즉물적인 가치로 대체한 것은 누구인가? 또한 끈적이는 글만 찾으며 육체를 관음 하며 어둠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은 나 그리고 우리의 행동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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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해지자. 정준영과 승리로 대표되는 이름은 현대 사유 체계의 대표이자 종말을 먼저 경험한 선구자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쫓았을 뿐이다. 죄가 있다면 남에게 들켰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그들을 비판하는 우리가 사도邪道 위에 우리가 동일하게 서있다면 그러한 비판은 진정한 효용성과 무게를 가지는가? 나는 단언컨대 아니라고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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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방울의 쾌락을 얻기 위해 부지불식간 삼킨 것들은 곱씹어보면 예상을 넘어서는 독소를 지녔다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다. 그것들의 반향은 생각보다 시커멓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기에 도식의 자리에 우리와 그들을 쉽게 치환해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의 주체에는 기사에 오르내리는 그들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치를 쫓았던 우리 역시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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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으로 중요한 논의, 그렇다면 맘몬을 폐위시키는 것은 가능한가. 쾌락을 좇지 않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보드리야르가 주창한 “소외의 극복은 불가능”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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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의 불가능을 주장하는 수많은 논리들과 예시가 있다. 실제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예수든, 부처든, 알라 등등 어떤 신도 인간이 좋아하는 건 말리지 못하니까. 인간은 원한다면 신도 만들어내는 존재아니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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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욕망에 기반한 움직임, 쾌락을 의식적으로 반성해야 하는 단 하나의 명명백백한 이유는, 바로 쾌락에게는 자기 통제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의 무한한 특성이 오히려 반성할 당위와 권위를 부여한다.      






  지난봄, 정준영과 최종훈, 승리의 단톡방 몰카 사건이 터졌을 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걔들은 재수 없어서 걸린 거라고 봐요. 솔직히 비슷한 남자 단톡방 많잖아요."


   놀라웠다. 내가 놀란 이유는, 나 역시 위의 문장이 성립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냥 걸린 것이었다. 걸린 것뿐, 그것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시시덕거리고 성적인 동영상을 찍어서 저들처럼 사진을 돌리며 ‘개쩐다’는 감탄을 했던 것도 아니다. 또한 인간 본연의 성욕을 놓고 당시 모든 사람을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하는 시선이 조금 꺼림칙하게 느낀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위의 문장이 성립한다는 생각에 대한 기저의식을 글로 형상화시킬 필요를 느꼈다.

*"모든 남성은 잠재적 범죄자이다"라는 명제는 설사 참이 될 수 있을지 언정 굉장히 무례하며 소모적인 싸움만 유발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 비방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밝힐지라도, 남녀가 가장 효과적으로 단절되는 길이 아닐까요? 양 성별 모두 공감과 존중을 받길 원합니다. 여성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정상적인 남자들이 잠재적 범죄자로 몰려 느끼는 억울함은 둘 다 존재합니다. 옳고 그른 게 아니라 감정싸움을 유발한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지금은 연대하여 함께 분노해야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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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때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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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래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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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도 유효한 글이다.  

  



  도대체 어디가 끝이란 말인가. 생각보다 바닥은 깊었다. 이영학-정준영-N번방까지. 어떤 이야기보다 비현실적인 현실이 근래 펼쳐지고 있다. 몇 개월 전과 달라진 것은 별로 없는 듯하다. 아! 이것 하나는 달라졌구나. 가수 정준영과 승리 등이 참여한 카카오톡 대화방의 존재가 알려진 이후 버닝썬, 정준영 동영상 등이 검색어 순위에 오른 바 있다. 그리고 지금은 N번방이 검색어 순위에 오르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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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 본 듯한 의견들이 또다시 대립각을 세우는 중이다. “모든 남자를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하지 마세요.”, “안 그런 남자도 있답니다.”, “26만 명이나 되는 숫자를 보세요!”, “다 처벌해야 해요.”, “그럼 몸을 파는 여자들은요.”, “저는 안 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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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집단이 가진 엔텔레키는 유효하다. 하지만 위의 글처럼 우리 스스로를 선함의 자리에, 옳고 바름의 자리에 넣을 수 있을까? 내가 이것에 유독 예민한 이유는, 왜냐하면 나는 그것들에서 우리가 줄곧 반복해왔던 어떤 거대한 실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거대한 실수들은 대체로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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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는 말한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적 증오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주식을 구매한 개인이나 그것을 판매한 중개인, 노예무역 회사의 경영자는 아프리카인에 대해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탕수수 농장 소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농장주들이 농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고, 그들이 원한 유일한 정보는 손익을 담은 깔끔한 장부였다.”


  나치 부역자 아히히만 역시 뉘른베르크 재판장에서 말한다. “법적으로 나는 무죄입니다.”, "책임 있는 지도자들과, 그들의 손아귀에서 한낱 도구로 일할 수밖에 없었던 나 같은 사람들 간에 선을 그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히틀러의 명령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일개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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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성년자 아이돌이 눈앞에서 춤을 춘다. 옷이 짧아질수록 좋다. 컨셉은 더 좋다. 그/그녀들의 학습권이나 인권, 근로 시간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눈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 좋다. 돈이 되니 좋고 기분이 좋으니 좋다. 생각은 안 할수록 좋다. 잠깐, 이것은 우리가 아는 ‘무엇’과 닮아있지 않은가.



  자본주의에서 ‘좋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무관심은 수많은 문제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편하고 좋다는 이유로 그것들의 소비자가 되었고 나약한 개인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하는 행동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비판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사도에 서있다는 사실을. 물론 사건이 가진 결과 행태는 그 정도가 무척이나 다르다. 하지만 닮아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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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통점, 닮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한다. 앞선 노예무역의 소비자도 그렇고 아히히만과 아히히만의 가족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앞선 N번방과 뿐만 아니라 아이돌의 짧은 치마를 느린 영상을 보며 히히덕 대는 사람들, 옷 사이로 속살이 잠깐 드러난 찰나의 영상을 유포하는 사람들, 남자 아이돌의 팔에 힘 줄 부분을 합성하는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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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현대 사회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가치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가치들을 평면화시켜 버린다. 단언컨대 우리 각자의 삶에서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하찮아지는 것은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수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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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러한 가치의 평면화에 저항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차원의 점과 선 사이를, 혹은 2차원의 평면에서 역풍을 맞아봤자 버티거나 휘청이는 것 말고는 별반 달라지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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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풍을 이용해 다른 차원으로 도약해야 한다. 작금 사회에는 거대한 바람이 불고 있다. 평면을 벗어나 3차원의 공간으로 날아오르려면 반대로 맞서 오는 역풍을 이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행기처럼 양력을 받아 창공으로 날아오를 수 있다. 비록 요동치고 불안정한 시작이 되겠지만 장애물 같이 여겨졌던 맞바람은 동시에 새로운 지평으로 이끄는 예인선 역할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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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금 만연한 범죄와 사회문제, 그리고 자조에 가까운 소비문화 이론들은 1,2차원의 지평에 부는 역풍일 것이다. 우리는 그 역풍들이 새로운 3차원의 세계로 날아오르게 만들어주는 도약대일 수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더하여 위의 즉물적 형태의 신을 자리를 폐위시키지 못한다면, 눈을 빼앗아 가는 거짓 진리관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현실을 탈취당한 채 언제나 지금과 같은 자리에 있을 것 역시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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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직 우리 사회가 생산적인 논의를 개진시킬 수 있다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야를 흐리는 것들이 아닌 정면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다고, 나는 정말로 생각한다. 사실 그렇게 믿고 싶다. 왜냐하면 이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희망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희망은 항상 적극적으로 찾아야지만 간신히 발견할 수 있는 가치였다.



  이 글은 N번방의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들, 혹은 모든 남자를 비난하는 글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소 지향하고 당연시해 온 유희가 얼마나 양면적인 토대 위에 있는지 생각해보고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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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 등산객 중 한 명의 담배꽁초로 인해 산이 전소되었다면, 그 날 산에 등산을 간 사람, 혹은 더 넓게 확대해서 평소에 등산을 자주 가는 사람 모두 산불을 방관했으니 산불을 내는데 동조한 사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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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 아닙니다. 하지만 등산을 가서 한 번이라도 담배를 태운 사람의 경우 그 비판의 정당성이 확보가 안된다는 말입니다.


  Q : 모든 쾌락이 나쁘다는 것인가요?  동영상뿐만 아니라 춘화 같은 성적인 그림의 역사는 수천 년도 더 되었는데, 또한 춘화를 보니 비단 현세대의 문제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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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 쾌락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쾌락 자체에 브레이크가 없으니 자각적으로 브레이크를 달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기술의 발달로 '상상이 실현'가능한 미래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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