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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기환 Apr 04. 2020

왜 함께 했냐고 물으신다면

동행의 이유



  고속 페리는 서걱서걱 과감한 모양으로 바다를 잘라간다. 배가 그리는 일직선과 묵직한 바다의 곡선이 부딪히며 튀기는 파편이 극적이다. 조각난 파도가 창문에 부딪치며 시퍼런 리듬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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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이란 시간에 감정을 입히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가는 시간을 벼르고 달래어 유효하게 만드는 일, 그것을 가능케하는 것은 분명 감정이다. 그는 그의 시간에 나를 입혔다. 연락을 받고도 섬에서 5일을 더 보냈는데도 아무 불평 없이 나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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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지와 가까워질수록 속이 검게 물들어간다. 반대로 내가 만들어낸 상황은 더욱 선명해진다. 죄책감을 훌훌 털어버리기 위해 섬을 떠났지만 떠나는 것과 그를 찾아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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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주 동안 수백 km를 이동해 내 물건을 가지고 온 그를 만나지 않은 채 떠나는 비행기 편에 앉아있는 나를 상상했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뭐 대단히 나쁜 사람이거나 쓰레기가 되는 것도 아닌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사람 대부분은 살면서 조그마한 크기의 ‘악의 없는 악의’를 저지른다. 그리고 그것이 서로의 인생을 흔들지 않을 만큼 사소하다는 이유로 적당히 넘어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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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나 그러한 넘어감은 상대방 역시 나와 같은 반응을 보이리란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함에 벌어지는, 합의된 악의였다. 닉이 나에게 터무니없는 호의를 보인 이상 이 상황은 ‘악의 없는 악의’의 영역이 아니었다. 시작이 비록 더러운 옷가지일 언정 그가 보인 친절로 인해 인간성의 문제로 확장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영역은 주로 명확한 마무리를 필요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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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닉이 묵는 호스텔로 바로 향했다.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얼마를 기다렸을까, 멀리서 작은 술렁거림이 들려왔다. 러너 복장을 제대로 갖춘 두 사람 뒤에서 목이 팔랑거리는 티셔츠를 입고 맨발로 뛰고 있는 남자,  닉이다. 그가 맞다. 쓰레기 조각도 많고 도로에 타일도 깔려있지 않은 곳에서 그는 정말로 맨발로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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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저 어린 반가움을 느끼는 사이 그가 웃으며 내게 포옹을 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글자 그대로 와락 안기는 포옹이었다. 내가 느꼈던, 그간의 감정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라 당황스러웠다. 솔직하게 옷을 왜 두고 갔느냐, 왜 이렇게 답장을 하지 않느냐 한소리 들을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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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과는 180도 다른 반응을 마주하자 그간 느꼈던 죄책감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그와 같이 반가운 마음으로 그를 만나러 간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오가는 택시비를 고민한 내 마음보다, ‘옷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귀찮지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한 내 마음보다 훨씬 고결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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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나는 서둘러 그에게 두고 온 옷을 달라고 했다. 그는 껄껄 웃으며 방으로 뛰어들어가 나의 옷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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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펨바부터 들고 온 나의 옷가지들은 내 기억보다도 훨씬 무거웠다. 그리고 깨끗하게 세탁이 되어 있었다.                                                     


  내가 버리려고 생각했던 옷,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옷을 그는 소중한 것이라도 된다는 듯 깨끗하게 빨아서 가져왔다. 그것을 가지고 오는 일도 어렵지만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나는 자연스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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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뽀송뽀송하게 정리된 옷을 받아 든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옷이 손 위에 얹히는 순간, 그동안 애써 외면하려 했던 나의 내부가 까마득한 구렁텅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속이 거품처럼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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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 앞에 오롯이 놓인 그것이 정확하게 뭔지 알고 있었다. 진동하는 비누 냄새로도 가릴 수 없는 것, 그동안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그것. 나의 비겁함. 상황 탓을 하며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했던 나의 비겁함, 편리라는 이유로 남에게 짐을 지우는 비겁함.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모조리 무시하려 했던 비겁함. 마침내 그것을 마주한 것이다. 나는 공포영화를 보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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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닉은 연이어 내게 질문을 던졌다. 2주간의 시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별일은 없었는지 등등. 모든 물음표에는 세세한 호의가 배어있었다. 나는 대화를 끝내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그의 질문에 뭉툭하고 건조한 단답을 뱉어댔다. 굉장히 무례한 어투였다. 하지만 어린아이 같은 닉의 미소는 끄떡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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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점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차라리 그가 빽하고 화를 낸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의 배려는 내게 과분했다. 그의 미소 역시 내가 원치도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무조건적인 친절에 내성이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닉의 무조건적인 친절이 숨이 막힌다고, 고맙기는커녕 지금의 혼란이 부탁 치도 않은 옷을 들고 온 그의 잘못이라고 강변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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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갑기도 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속을 마구 휘저어 정신이 어지러웠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의 감정들을 입 밖으로 모조리 토해내고픈 심정이었다. 앙상한 정신 상태. 그때 그가 결정타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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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내가 괜찮다면, 함께 여행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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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지금껏 어떤 여행을 했던 상관없이, 누구로 살아왔든 간에 철저히 여행자로서 하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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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어떠한 계산도 없는, 어떠한 저의도 없는 담백한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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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뜬금없었지만, 갑작스러웠지만 그의 제안이 무척이나 거대하게 느껴졌다. 일체의 만력도 느낄 수 없었지만 너무나도 압도적인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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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싫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섣불리 자리를 뜨지 못했던 이유는 아마도 그가 그런 친절함을 가질 수 있게 만든, 그를 계속 미소 짓게 만든 근원적인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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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것에 홀려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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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함께 할 운명이었던 것인가. 당장 내일, 정말 출발하기로 했다.  여행의 끝에서 기묘한 여행자와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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