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듯이 어둠 속에 팔을 넣어 휘두른다. 아직까지는 내 손아귀에 아무것도 없지만 분명히 해낼 수 있다. 이왕 도와주는 김에 성의를 보일 수 없냐는 핀잔을 듣고서야 닉은 핸드폰 플래시를 요리조리 조정한다. 나는 빛을 이마 가까이 더 올리라고 명령하듯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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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렌테의 칠흑 같은 밤에, 나는 지금 날아다니는 산박쥐를 잡으려고 기를 쓰고 있다. 불과 몇 개월 전 지하철에서 핸드폰만 보고 있었던 서울의 나와 유쾌한 작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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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잠시 발코니로 나왔는데 하도 밤이 짙어 핸드폰의 플래쉬를 켰더니 사방에서 박쥐들이 날아든 것이다. 처음에는 박치기를 좋아하는 미친 새인 줄 알았지만 그것이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서 정체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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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잡이는 취기의 결과였다. 저녁 시간, 칼이 캐나다인이 가장 사랑하는 칵테일을 보여주겠다며 진저 사이다에 블랙 럼 투 샷, 손으로 짠 라임 주스와 얼음을 넣어 다크 앤 스토미라는 우울한 이름의 술을 조제해주었다. 이름과는 달리 달고 산뜻한 맛이라 연거푸 들이키다 셋 다 취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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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잡이를 가능케 한 술맛만큼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칼이라는 사람이었다. 칼은 알고 보니 닉의 후원자였으며 정기적으로 전 세계의 여행자들에게 일정하게 매달 1인당 75달러의 금액을 지원하고 있었다. 설사 일면식이 없더라도 말이다. 대상으로는 여행하다가 직접 만난 사람, 선한 가치를 추구하며 여행을 하는 사람, 특별한 여행을 하는 사람 등으로 다양했다. 이러한 지원은 사랑을 위해 아프리카를 뛰는 닉에게도 해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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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칼은 평소 선순환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이런 태도는 이번 러닝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아프리카를 뛰는 김에 러닝과 연관된 크라우드 펀딩을 만들어 캐나다 물 절약 캠페인을 후원하고 있었으며 뛰는 km 수에 비례하여 기부를 하는 동시에 km 수를 SNS에 올려 사람들에게 펀딩 인사이트를 주었다. 지금까지 칼이 뛰는 것을 보고 모인 금액이 10만 원가량 된다고 했다. 적은 금액이지만 의도를 생각한다면 많고 적음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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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참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동시에 어른이란 건 이렇게 보기 드문 건가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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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손끝에 스치기만 했을 뿐 한 마리의 박쥐도 잡지 못했다. 실패. 나는 방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친 후 미리 텐트를 쳐놓은 캠핑장으로 향했다. 닉은 그사이 잠들었는지 텐트 안에서 코 고는 소리가 낭낭하게 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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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점점 후반부로 치닫고 있었지만 당장 오늘의 계획은 없었다. 사실 믿을만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여행은 계획이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디서든 뛰기만 하면 여행이 되었던 것이다. 미리 짜여져있는 계획은 우리에겐 오히려 제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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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의 카메라와 장비로 철저히 계산된 플롯을 담아내는 여행 역시 좋은 여행이다. 몇 개월 동안 세세하게 일정을 세워 예약한 일정과 장소에 딱 맞게 돌아다니는 여행 역시 좋은 여행이다. 허나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운다하더라도 모든 여행자는 집을 떠난 이상 운이라는 것에 본인을 맡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우연에 지배되는 것, 그리고 그 우연이 켜켜이 쌓여 하나의 과정이 되고 그것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지난한 과정 역시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에는 앞선 두 여행보다 분명한 자유의 감각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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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으로 사과를 오물오물 씹으며 닉이 만나야 할 사람이 생긴 것 같다고 웅얼거린다. 닉은 SNS에다가 매일의 여행에 대해서 업로드를 했는데 그걸 보고 우리 셋이 처음 만났던 호스텔의 여행자들이 이렌테 근처에 있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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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십분 후, 칼과 닉이 요가를 즐기는 사이 터프하게 생긴 지프차가 굵은 곡선을 그리며 우리 앞에 멈춰 섰다. 드라마틱하게 흩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갈색 피부의 건강한 여자 두 명이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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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국적의 백인 켓과 콜롬비아에서 온 베티나. 여자 둘이서 팀을 이뤄 여행 중이며 아프리카 최남단 케이프타운에서 이집트의 카이로까지, 자신들의 지프 차량을 직접 운전하며 아프리카 종단 여행을 하고 있다. 그녀들의 여행이 특별한 점은 여행하며 만난 여성들을 인터뷰하여 아프리카의 여성 인권 문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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켓은 그간 찍은 영상을 자랑스레 우리에게 내밀었다. 화면 안에서 전통복장을 입은 할머니들과 아줌마, 소녀들이 그녀들의 모국어를 열심히 내뱉고 있었다. 둔탁한 발음을 가진 낯선 언어였으나 말하는 이 모두 높은 긍지와 확고한 세계관과 가진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살며시 눈길을 돌리니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 있는 켓의 얼굴에서 어떠한 사명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