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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기환 May 13. 2020

교수님이 아파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기초

  5월이지만 여전히 사이버강의를 하고 있다. 코로나 때문이다. 과제도 많고 등록금도 아깝다. 물론 1학기가 절대평가로 진행되기에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등록금이 아깝다는 기분은 지우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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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업 시작 전, 아무 생각 없이 컴퓨터 앞에서 대기한다. 카카오톡 메시지로 Webex 주소가 날라오면 방으로 접속한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마이크를 체크한다. 인사를 하면 수업이 시작된다. 탁한 눈동자로 대부분 무던하게 시간을 흘려보낸다. 보통 아무 일 없이 수업이 끝나지만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강의를 듣다가 문득 어떤 걱정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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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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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현재 한국에 위치한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는 학생이다. 우리 학교는 특성상 루마니아, 가봉 등등 별의별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많다. 하지만 초창기에 코로나가 한국에서 유행하면서 외국인 친구들은 다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외국인 교수도 마찬가지. 사이버 강의가 전면화되기도 했지만 급박한 상황에서 외국인에 대한 지원이 많지도 않고 WHO에서 펜데믹을 선언하면서 미래가 더욱 위태로워진 시기에 가족과 함께 있는 게 심리적으로 안정을 느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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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사이버 수업을 들으면 똑같은 화면에 파키스탄에서도, 이란에서도 UAE 아부다비에서도, 체코와 서울 이문동 원룸에서 동시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글로벌하다. 그렇기에 문제도 많다. 연결망이 좋지 않아 수업이 끊어지기 일쑤이며 정전이 자주 된다는 파키스탄에 사는 친구는 몇 주 째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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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하고 다시 처음으로, 교수님이 아프다. 수업을 하면서 콧물을 흘리고 연신 이마를 짚는다. 기침을 너무해서 걱정스러울 정도이다. 우리 모두 농담 삼아서... COVID THING?이라고 말은 하지만 심히 걱정이 된다. 나이가 많기도하지만 교수님은 지금 코로나가 대유행인 그녀의 조국 이란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전염병에도 격차가 있다는 걸 크게 느끼는 편이다. 전세기와 병원, 키트 수 차원에 주목한 말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계급의 차원, 관심의 차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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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계급 차원의 격차는 사회적 불평등 연구의 석학으로 꼽히는 로버트 라이시 버클리대학교 교수가 적확하게 포착해내었다. 그는 코로나19로 미국 사회에 새로운 4개의 계급이 감지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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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계급 : 원격 근무가 가능한 노동자(The Remotes)

  이들은 전문·관리·기술 인력으로 노트북으로 장시간 업무를 해낼 수 있고, 화상회의를 하거나 전자 문서를 다룰 수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코로나19 이전과 거의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 라이시 교수는 이들이 위기를 잘 건널 수 있는 계급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계급 : 필수적 일을 해내는 노동자(The Essentials)

  의사·간호사, 재택 간호·육아 노동자, 농장 노동자, 음식 배달(공급)자, 트럭 운전기사, 창고·운수 노동자, 약국 직원, 위생 관련 노동자, 경찰관·소방관·군인 등이다. 위기 상황에서 꼭 필요한 일을 해내는 이들로, 일자리는 잃지 않았지만 코로나19 감염 위험 부담이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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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계급 : 임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The Unpaid)

  소매점·식당 등에서 일하거나 제조업체 직원. 코로나19로 무급휴가를 떠났거나,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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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계급 : 잊혀진 노동자(The Forgotten)

  이들은 미국인 대부분이 볼 수 없는 곳, 이를테면 감옥이나 이민자 수용소, 이주민 농장 노동자 캠프, 아메리칸 원주민 보호구역, 노숙인 시설 등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물리적 거리 두기가 불가능한 공간에서 머무르기 때문에 코로나19 감염 위험이 가장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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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어보면 미국에서만 유효한 구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로운 계급을 부여받아 평소에 돈을 많이 벌던 프리랜서 친구가 백수가 되고 퇴사를 고민하며 죽지 못해 살던 친구가 회사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기적적인 상황을 목격하게 됐다. 격세지감이다. 물론 월세를 받아먹고사는 친구는 여전히 잘 먹고 잘살지만...



유독 프랑스가 많아요!



   다음으로 나는 평소 우리의 관심에도 격차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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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코로나 관련 키워드를 브런치에 쳐보자. 심리적으로 가까운 나라들, 일본 중국, 그리고 유럽권의 뉴스가 대부분이다. 아프리카와 중동, 등등 역시 세계를 구성하고 있지만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지지 않은 탓인지 관심도 먼 것 같다. 물론 브런치는 독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구성되기에 상대적으로 거주자가 많은 지역, 즉 유럽이나 미국 등지의 이야기가 많이 올라오는 것이 이해는 가지만... 섭섭한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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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교수님의 조국, 이란의 경우 난리도 아니다. 이란은 초창기 감염자와 사망자가 중동에서 가장 많았다. 이란은 다른 발병국에 비해 확진자와 사망자가 늦게 발생했지만(2월 19일) 이후 사망자가 빠르게 늘어나며 코로나 초창기 세계에서 가장 높은 감염률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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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이점으로는 이란의 경우 고위층이나 정부 지도계층의 감염률이 굉장히 높다는 것이다. 지난 2월 24일에는 이란 코로나 대응의 최전선에 있는 하리르-치 보건차관이 생방송으로 중계된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연신 기침을 하고 휴지로 이마에 난 땀을 닦았는데 방송이 끝나고 검사를 해보니 정작 그가 양성으로 판정된 해프닝이 있었다. 또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의 넷째 아들 메이삼의 장모가 코로나19에 걸려 3월 22일 사망했고 3월 27일 이란의 최고위 여성 관료인 마수메 엡테카르 이란 부통령이 코로나에 감염되었다.





  BBC의 분석에 따르자면 고위층의 감염이 많은 것은 상대적으로 중국인과 협상을 할 일이 많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더하여 의심 증상자들 가운데 고위층이 먼저 검사를 받기 때문에 감염 여부를 빨리 확인된다는 것도 그 이유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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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이 해주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란은 5월에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했다. 지난 3월 26일 정부 차원에서 이동 금지령을 결국 발동했으나 이후 마땅한 지원이나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코로나를 무릅쓰고 일을 하러 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란 인구의 대부분은 세 번째 계급 : 임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The Unpaid), 네 번째 계급 : 잊혀진 노동자(The Forgotten)이 차지한다. 굶어 죽는 것과 코로나에 걸려 죽는 것이 그들에게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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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수출 봉쇄에 안 그래도 애를 먹던 이란은 교역을 유지하던 나라들까지 국경 봉쇄에 나서면서 목구멍이 완전히 막혔다. 이후 서민들을 위한 대출 및 보조금 지원, 세금과 공과금 납부 유예 등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부족했는지 1962년 이후 58년 만에 최초로 IMF에 금융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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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란의 코로나 추세는 5월 3일 정오 기준으로 사망자는 6203명, 확진자는 9만 7424명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는 3월 9일 이후 55일 만에 가장 낮은 수치라고 한다. 누적 완치자는 7만 8천422명으로, 다행히 완치율 역시 80.5%로 점점 높아지는 추세이다.



  아랍, 중동권은 지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여전히 한국에서 먼 나라이다. 특히나 중동권은 직접 경험할 수 없기에 막연히 이미지로 접하게 되는데, 불스틴이 말했듯 이미지는 ‘가개념’ 즉 진실된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사람에게 크게 남는 얄미운 특성이 있다. 리프만도 말한다. 이미지는 ‘머릿속의 그림’인데 대부분 실제 환경에서 얻은 직접적 경험보다 매스미디어처럼 의사 환경에 대한 간접적 경험을 통해서 더 크게 형성되는 경향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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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동은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멀어졌다. 현대에도 중동지역의 소요와 내전으로 자극적으로 소비될 여지가 많은 것은 물론이고(실제로도 영화에 테러리스트들은 다 아랍 권역의 사람들이다) 다수를 차지하는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vs 이슬람이라는 도식으로 의도적인 적대 관계를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사람 대부분은 중동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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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찬히 생각해보자. 실제로 중동권의 문화, 사람과 직접 대면한 사례가 극히 적을 것이다. 나는 이슬람이 악의 세력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 한번 찬찬히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서양의 시각과 교묘하게 침투한 문화에 본인이 설득당한 적이 없는지, 그것을 비판 없이 흡수한 것은 아닌지. 왜냐하면 그곳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구성하고 있는 논리들은 생각보다 매우 파편적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아래 특정 집단의 우월성에 대한 집요한 욕망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Sébastien Thibault


   다시 코로나 사태로, 2020년을 보면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나오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Valar Morghulis) 법칙이 생각난다. 극에서와 마찬지로 현실에서도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가릴  없이 무참하게 죽어나간다.


  이러한 코로나 때문에 모두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오늘을 맞이하게 되었다. 앞서 코로나로 4가지 계급이 새로이 출현했다고 말했다. 글을 읽는 누군가는 이 시기를 실존적 걱정 없이 이겨낼 것이고 누군가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갈 것이다. 외부 요소로 인해 개인의 삶이, 계급이 바뀌었다. 사회에서 '나의 위치'를 구성하는 경계가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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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이 불안정한 시대, 이러한 시대가 또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고 대처해야 할까? 다음을 보장하고 코로나 이후를 생각할 수 있는 토대를 세우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정부차원의 긴급재난 자금일까, 아니면 각국의 국민 통제 능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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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쩌면 생각한다. 가장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은 제도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위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 특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네러티브에 자신을 투영해 보는 시도일 것이라고.





1000억짜리 수비수가 미래를 걱정한다(...)



  불안정한 시대라고 했다. 누구는 곤두박질치고 누구는 상승한다. 기본 지원 재난 소득이든, 무엇이든 정부 차원의 대처가 필요한 것도 맞다. 하지만 한국 정도의 경제 수준 차원의 논의일 뿐이다. 짓궂은 상상력을 발휘해서 만약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무기가 서울에 터진다면, 만약 우리 한국이 못 사는 나라였으면 어땠을까? 그때도 지금과 같이 긴급재난 지원금을 정부에 요구할 수 있었을까. 아마 미국이나 경제력 있는 선진국들이 우리 대한민국을 지원해주지 않는다고 울분을 터트리지 않았을까. 그들이 우리의 어려운 삶에 함께 공명해주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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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내일을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기초는 자신들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에 근거한다. 물론 이것은 어렵다. 타인을 살피는 것, 남에게 나 자신을 투영해보는 것은 정말로 쉽지가 않다. 마음은 지역과 심리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지역과 내가 사는 수준이 형성하는 '나의 위치'를 허물고 전혀 다른 타인에게 이입하는 것에는 큰 상상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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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우리는 코로나로 경험하지 않았는가. '나의 위치'가 얼마나 유약한 지면에 서있었는지. '나의 위치'가 얼마나 세계와 초연결되어 있는지.





  혹자는 공감이 과한 시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다이엔 아버스의 말처럼 "공감을 거부하는 것이 관심과 리얼리티를 위한 공감을 열어준다"는 말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전세계가 단 '하나의 이유'로 고통받는 이때, 공감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언제 해야 할까. 우리는 역설적으로 코로나라는 공통된 하나의 네러티브를 가지게 되었다. 교수님의 나라인 이란도, 우리나라도, 세계 전역이 코로나로 신음하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이 위의 시도가 가장 필요한 동시에 용이한 시기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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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자의 불행과 고통에 반드시 공감해야 하라는 말은 아니다. 타인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 실제로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같은 맥락으로 타인에게 공감하지 않는 이들을 비난하고 무지하다고 깎아내릴 생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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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공감하지 않는 것과 '공감할 생각'도 없는 것은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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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사람에게 '공감할 생각'을 가지는 것, 이것은 공감과는 다른 방식이다. 앙드레 지드가 책 <지상의 양식>에서 "공감이 아니라, 나타나엘이여, 사랑이어야 한다."라고 말한 이유는 이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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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사람에게 '공감할 생각'을 가지는 것. 인간은 모든 타자에게 공감할 수 없지만, 특정한 개인 혹은 집단에게 의도적으로 마음을 들일 수는 있다. 이러한 행위,  '타인의 네러티브에 관심을 쏟고 의도적으로 자신을 투영하는 과정'을 굳이 한 단어로 칭해보자면 사랑이 아닐까. 공감은 공통된 부분만을 인정할 뿐이다. 공감이 곧 사랑은 아니다. 대상을 먼저 사랑한 다음에야 ‘나’와 ‘타인’이 교류하고 확장되는 공감이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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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나는 한국뿐만 아니라 이란 사람들의 안녕도 빌고 싶다. 뿐만 아닌 우리 모두의 안녕을 빌고 싶다. 이것은 나의 의도이며 무엇보다도 지역과 인종, 계급에 소급되는 사랑은 반쪽짜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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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이 빨리 쾌차하셨으면 한다.

  학생의 입장이 아니라 인간의 입장으로.

  어떤 특정 마음을 겨누지 않고, '우리'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 덧

  이러한(나의) 주장은 성기며 반론의 여지가 많다. 우리가 어느 한곳에 집중하는 순간 주변부가 생겨버리는 사유의 함정 때문이다. 그렇기에 (1) 동티모르, 레소토 같은 나라들은 왜 생각 안 하시죠? (2) 지구 전체, 혹은 인류를 사랑하는 게 가능하기는 한가요?라는 반론을 들어도 딱히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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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2) -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은 어렵고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설사 불가하다고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할 대상으로 치부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한편으로 그간 행해져 온 개개인의 (2)에 대한 노력이 왜 폄하되고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봐야 할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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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차 말하고 싶은 것은, 모든 대상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쏟는 것은 불가하다. 이것은 신의 영역이다. 모든 타자의 불행과 고통에 반드시 공감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고 본문에 써놓은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이 고통의 시대에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불행을 '인간은 원래 그렇다는' 도식 속에 묻어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 태도가 굉장히 비겁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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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에 대해서도, 인식론적인 측면에서도 배우지 않은 것,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적으로 사람은 그저 자신이 사는 세계에 대해서 진술하는 것뿐. 나는 내가 사는 세계에 대해서 진술했다. 어쩌면 글을 쓰는, 쓰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가 이러한 행위에 있지 않을까.


+덧

  개개인이 노력을 욕심이나 초월이라는 거창한 단어로 칭하지 말자. 설사 그것이 한계라고 하더라도 개개인마다 그 한계의 범위는 다를 수 있다. 더하여 만약 그것이 진정 한계라면, 더더욱 밀고 나가야지 않을까. 이것이 우리의 한계라는 것을 알았으니.


+덧

 이태원 클럽에 간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사진, 기사 출처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076&aid=0003565410

https://jcpa.org/coronavirus-infects-iran-and-beyond-criticism-of-the-iranian-regime-grows/

https://www.mk.co.kr/news/world/view/2020/05/454064/

https://www.nationalreview.com/2020/03/will-irans-regime-survive-coronavirus/

https://iranprimer.usip.org/blog/2020/feb/24/coronavirus-strikes-iran

https://news.joins.com/article/23718949

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20/apr/25/covid-19-pandemic-shines-a-light-on-a-new-kind-of-class-divide-and-its-inequalities

https://www.nippon.com/en/japan-data/h00673/coronavirus-cases-by-country.html

https://news.joins.com/article/23718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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