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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기환 Jul 04. 2022

개복치-여행자

쉽게 죽지 않는다. 

뭔가 멍청한데... 기엽군


  개복치는 쉽게 죽지 않는다. 개복치가 유리멘탈이라 쉽게 죽는다는 인식은 게임 <살아남아라!, 개복치>로 인해 형성된 허구이다. 게임은 단순하다. 플레이어의 목표는 오직 하나, 개복치를 무럭무럭 성장시키는 것뿐. 하지만 예상과 달리 게임은 쉽지가 않다. 화면에서 유영하던 개복치가 별의별 이유로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물이 차가워서 사망. 다가오는 거북이와의 충돌을 걱정하다 사망. 수면 위로 점프했다가 착수하는 충격으로 사망. 공기 방울이 눈에 들어가 스트레스로 사망. 하물며 친구가 죽는 것을 보고 놀라서 죽기도 한다. 이러한 개복치의 사소한 죽음들은 게이머들의 흥미를 뚝 떨어뜨릴 것 같지만 웬걸, 예상과 달리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특유의 허무를 느끼게 하여 더욱 개복치에게 애정을 쏟게 만드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으면서, 또 희박한 자존으로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의 마음속 물렁한 부분을 대변해주는 캐릭터의 빈자리를 개복치가 차지하면서, 개복치는 이전과는 달리 단순 어류가 아닌 유리멘탈의 대명사로 통용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게임과 달리 개복치는 쉽게 죽지 않는다. 오히려 죽이기 힘들다. 개복치는 총으로 쏴도 잘 뚫리지 않는 단단한 피부를 가지고 있으며 신체의 일부가 잘려 나가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헤엄치는 재주도 있다. 성체가 되면 천적이 없다. 그래서 헤엄도 느릿느릿하다. 수면 위에 둥둥 떠서 햇빛을 받으며 낮잠도 잔다. 의외로 쓸모도 있다. 개복치 요리가 아주 맛있다고 한다. 사실 이쯤 되면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개복치를 어떻게 죽이지 않을까가 아니라 요리를 위해 어떻게 개복치를 죽여야 할까가 아닐까? 이러한 인간의 고민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아도 지들이 어쩌겠어’라고 생각을 하는 건지 개복치는 독 때문에 다른 생물들이 먹을 생각도 하지 않는 해파리를 잘근잘근 씹으며 오늘도 심해를 유유히 유영한다. 개복치는 쉽게 죽지 않는다.




  이렇게나 인식과 실체의 괴리가 큰 개복치,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가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여행자. 여행자를 떠올리면 젊음이나 청춘과 같은 멋스럽게 몽글몽글한 단어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러한 연상은 미디어와 문명의 발달로 인해 복합적으로 형성된 허구이다. 여행자는 전혀 멋지지 않다. 오히려 찌질하기 그지없다. 며칠 동안 씻지 못해 기름 낀 머리와 그을린 피부, 때 낀 손톱. 인생의 정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 외치지만 정작 매일 고민하는 건 가성비뿐. 성격도 좋지 않다. 여행자는 툭 하면 싸운다. 동행과 싸우고 상인과 싸우고 식당 주인과 싸우고 하룻밤 지나면 헤어질 룸메이트와도 싸우고 가만히 떠 있는 태양과도 싸운다. 그들은 또 멍청하기도 하다. 자유를 원한다며 세계를 떠돌지만 실상 자유가 뭔지도 모르는 바보 멍청이. 솔직히 여행자는 개복치만도 못하다. 알면 알수록 하찮은 생선에서 극강의 바다 몬스터로 변하는 개복치와는 달리, 알면 알수록 여행자는 하찮아지는 것에 더불어 쓸모도 없기 때문이다. 헌법상의 권리로 인해 여행자는 요리될 수 없다.


  개복치를 모르기에 우리가 게임 속 개복치를 믿어버린 것처럼, 여행자에 대한 믿음도 이와 비슷하다. 과거 인터넷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에는 타지를 경험해본 여행자들이 하는 말 대부분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해외를 경험한 사람도 적어 정보가 없으니 팩트 체크도 불가. 이러한 정보의 부재는 성역화 비스무리하게 이어져 사람들은 여행자들이 말하는 지시체 흐린 말들을 주워섬기기에 이른다. 이걸로 돈이나 지위를 얻은 사람도 역사적으로 꽤나 있다. 한국은 그 정도가 조금 심하다. 우리나라는 과거 세계화를 위해 서구 모델을 착실하게 신봉했는데, 미제 상점과 깁미 초콜릿으로 요약되는 유구한 전통 위에서는 서구권을 찍먹하듯 경험한 사람이라도 '알파 휴먼'으로 쉬이 추앙되었다. 현재도 전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방송은 유럽에서만 버스킹을 하고 식당을 차린다. 황인종에 관한 모멸적인 발언이 녹화되어도 초인적인 아량과 자기기만을 발휘,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니 여행이, 여행자가 좋아 보일 수밖에.


  이렇게 여행자는 실체와 다른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알맹이가 없는 것은 결국 까발려지는 법. 인터넷과 교통수단의 발달, 국제 정치의 안정화가 이루어지면서 여행자의 민낯이 샅샅이 드러나고 있다. 바야흐로 여행자에게 엄혹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을 굳이 죽기 전에 꼭 먹어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나의 잃어버린 자아는 인도에도, 아이슬란드에도 없다는 것을. 프랑스 파리는 아름다운 만큼 더럽고 여행 프로에 나온 연예인과 작가, 여행 유튜버들은 사실 직업정신이 투철한 노동자라는 것 역시 알게 되었다. 그 증명으로 한때 필수에 가깝던 “저는 세계여행을 떠나서 진취적으로...“라는 식의 자소서를 이제 아무도 쓰지 않는다. 지금 여행은 쇼핑몰에서 옷을 찍기 위한 배경, 혹은 조회 수를 위한 콘텐츠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렇듯 여행은 별 게 없다. 사실 누구보다 이러한 여행의 현실을 아는 사람들은 여행자들이다. 그들은 직접 여행을 떠나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자는 스스로를 기만한다.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그들이 멍청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의 정체성에서 여행이 큰 부분을 차지해버린 이유가 크다. 알량한 자존은 스스로를 과대포장하는 법, 빼빼로처럼 손가락 하나로 부러트릴 수 있는 자존을 감추기 위해 그들은 매일이 빼빼로 데이인 양 축제 같은 기분으로 살아간다. 사실 이 정도 되면 광기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그들은 미친 사람들이다. 영화계 거장 트뤼포는 영화를 좋아하는 단계에 대한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첫 번째 단계는 좋았던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남기는 것.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영화를 실제로 만드는 것이라고 영화에 미치는 단계를 설명했는데, 이 말에 근거한다면 여행을 실제로, 그것도 여러 번, 그리고 여기 이렇게 글로 남기기까지 한 사람들은 실로 여행에 미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여행자는 미쳤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부모는 있다(?). 무릇 부모님이 그러하듯 여행자의 부모도 미친 자식을 위해 “저러다 우리 애 인생 망해욧!” 하며 매일매일 기도를 올린다. 지문이 닳을 정도의 정성은 마침내 신에게 닿는다. 정성에 감복한 신은 삶의 본질적 허무를 통달하였기에 염라대왕을 도와 일하고 있는 알베르 까뮈를 여행자의 꿈에 개입시키기에 이른다. 까뮈는 여행자의 꿈에 등장하자마자 그 유명한 고전 『시지프 신화』의 첫 문장을 말한다. “여행자 아무개야. 사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은 자살할 것인가 말 것인가란다. 제발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려무나. 인간인 우리는 그런 부조리에...” 까뮈가 다음 말을 뱉으려는 순간, 새벽 버스를 타기 위해 여행자가 오전 3시 30분에 맞춘 알람이 울리고, 여행자는 창가 자리를 얻기 위해 눈을 비비며 안개 속으로 겅중겅중 걸어가다가 문득 꿈이 생각나 중얼거린다. “내게는, 나의 삶에는 여행이라는 확신이 있어요. 이게 내 의미에요. 이런 아름다운 세상에서 뭔 자살?”


  그래서, 그렇기에 여행자는 여행을 떠난다. 인생에 무엇이 있다고 믿으면서, 현실의 차가움 너머에 있는 현재에 집중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 그 나라에서만 맡을 수 있는 특수한 냄새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저 그 순간에 존재하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로 여행을 떠난다. 보이지도 않는 국경선을 넘는 게 뭐 그리 신이 나는지, 그 기분과 지구 곳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미소를 쌀으로 삼아서, 모든 고생에 대한 보상이 여행으로 통용되는 것처럼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다들 하는 여행'과는 다르게 자신의 여행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면서, 혹시 세상에서 지금 자기가 제일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멍청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여행을 떠난다. 짐을 싸고 풀고 잃어버리고, 몇 날 며칠을 씻지도 못하고 땀을 흘리며 울지만 여행을 떠난다. 멀쩡히 살아가다가 보증금을 빼고, 퇴사를 해서, 은퇴를 하고 마누라에게 바가지를 긁히며,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머리숱을 두건으로 가리고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나이가 들며 생기는 필연적인 패배감을 오히려 동력으로 추대하여 곱씹으면서, 그딴 짓 쫌 하지 말라는 말이 등을 타고 흐르는 와중에도 컵라면 스프와 면을 분리해 재포장하고선 여행을 떠난다. 세상 사람 모두가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냐, 그 돈으로 주식을 하고 부동산을 사라고 외치지만 ‘나는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여행을 떠날 거야’라고 되뇌며 박해받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집으로 돌아와서야 끝이 나는 그 행위를 위해서 집을 떠나면서 말한다. “여행자는 쉽게 죽지 않는다.”



뭔가 힘들었는데... 그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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