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혈압은 숫자로 계량할 수 없는 공기와 같은 질병이다. 지난 2주간 죽다 살아났다. 바닥을 기어다니며 꾸므럭 구름 낀 하늘처럼 낮도 밤도 아닌 날들을 보내며 이러다 죽는건가 하며 꿈도 안꾸는 잠을 내리 잤다. 자고 일어나면 해가 질 무렵이었다. 그제서야 밀린 집안일과 어린이집과 남편 손에 맡겼던 아이들을 거둬 들이며 내가 아닌 다른 가족들의 하루를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밤, 밤에는 밀린 공부를 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걱정된 남편은 내 입에 꿀물과 다크초콜렛을 갖다 댔지만... 중학생 때부터 나를 괴롭혀 온 지긋지긋한 먹구름은 이번엔 정말 오래갔다. 어머님이 그러셨던가, 아이 낳은 달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아프다고. 달력을 보니 둘째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3년 전 오늘 보름달같이 부푼 배로 봄이 기웃거리는 거리를 걸어다녔다. 팡, 하고 소리도 아픔도 없이 꽃들이 만개하듯 태어난 둘째가 지나간 자리가 이렇게 힘들다고? 믿기지 않지만 그렇다 치고, 근거는 없지만 생색 낼 이유라도 찾은듯 위안이 됐다.
안나가병. 그런 이름의 병명이 있다면 아마 나는 중증환자일지도 모른다. 저혈압은 단지 그 합병증일 뿐이고.
안나가서 그래, 하고 나처럼 외출을 좋아하는 둘째는 나가자 소리에 누구라도 먼저할 것 없이 서둘러 챙겨입었다. 집돌이 첫째 아들은 내팽겨쳐질뻔한 위기를 겨우 모면하고 툴툴대다 마스크를 쓰고 따라 나왔다. 막내가 탄 유모차를 선두로 아이들과 아파트 단지를 돌았다. 어디 갈만한 데도 마땅치 않은 산 옆 동네에 살다보니 우리의 발걸음은 아파트를 돌다가 헤매기 시작했다. 마치 n극을 만난 n처럼 휙 휙, 집에서 일하는 남편에게 전활걸어 sos를 쳤다. 여보, 집에 들어가기 싫은데 어디가지? 미션이 주어졌다. 횡단보도 건너 꽈배기 가게. 6살, 4살, 그리고 두돌이 안된 유모차 안의 탐험가들에겐 흐린 날 물웅덩이를 지나 꽈배기를 사러가는 길도 모험이었다. 비가 온 직후라 물웅덩이가 아주 많았다. 장화도 신었겠다 거칠것도 없이 첫째가 눈치를 보다 나와 유모차를 앞질어서 물웅덩이에서 첨벙댔다. 물이 어깨까지 튀었고 아예 둘째는 두 발로 뛰었다. 나는 이대로 집으로 갈까봐서..서둘러 두 아이들의 꺄르륵깔깔 아파트 단지를 울려퍼지는 궁극의 신남을 싹둑썰기 했다. 안돼, 아직은. 이렇게 집에 갈 수 없었다. 다 젖은 애들을 벗기고 씻기는 에너지를 생산하려면 나는 지금보다는 더 많이 걸어서 저혈압을 펌프질하듯 올려야했다.
"애들아. 동그란 팥도너츠와 꽈배기가 있어 근데 몇개씩 사지?" 하며 첫째아이에게 엄청난 연산을 수행시키며 길 가는 동안 첫째의 무단이탈을 막았다.
쉴 새 없이 재잘대는 둘째는 걷느라 숨이 차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저기 봐봐 아직도 하와이 못찾았나봐. 하와이 같이 생긴 하얀 강아지 한번 찾아볼래. 귀는 세모나네?" 둘째에겐 몇주 전부터 동네에 붙은 강아지 찾는 전단지 속의 강아지에게 관심을 돌리게 했다. 첫째에게 쓴 전략과 정반대의 수법이다. 아이의 측은지심을 써먹자니 마음이 안좋았지만 안전하게 꽈배기 가게까지 도달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금일 휴업.
오늘 문 닫으셨네? 아 그래? 그럼 집에 가자.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아이들도 나도 꽈배기가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에. 유턴해서 돌아오는데 유모차 안의 막내가 잠든 것을 발견했다. 아 이런... 망했다. 속으로 외치며 막둥이를 일찍 재우고 내 일을 하려던 계획이 방금 지나간 것을, 다시 한번 막내 이름을 애타게 몇번씩 부르며 확인했다. 첫째가 유모차 안에 차가운 손을 넣어 흔들어봐도 둘째가 신발을 벗기며 놀려봐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막내는 쌀쌀한 날씨에 두툼하게 껴입은 옷과 나의 회장님 모시는 20년차 베테랑 기사의 주행실력 못지 않은 유모차의 주행을 아늑하다 칭찬하며 꿈나라로 멀리 저 멀리 떠나버렸다.
집에 돌아오자 현관에서 우릴 맞이한 남편은 내 컨디션이 어떤지 먼저 물었다. "정말 '안나가병'이었나봐, 기력 되찾았어."
남편은 정말 다행이라며 (다시 육아를 내게 일임할 수 있음에도 크게 안도하는듯 했다) 내일부터 계속 나가라는 약 처방을 해줬다. 그리고 순간 유모차에서 돌하르방같이 잠든 막둥이를 발견하곤 어서 깨워 하고 소릴 질렀다. 남편 눈가의 졸린듯 다정하게 접힌 눈가의 주름이 일순간 사라지고 응급실의 심장 제세동기를 찾는 의사와 같이 잽싸게 유모차 커버를 열었다. (찢는줄 알고 놀래서 잡았다.) 이미 늦었어. 첫째가 웅얼거리며 신발을 벗는다.
그렇다. 그날 이후로 나는 기력을 되찾았다. 나는 가족들 덕분에 몸을 일으키고 가족들 덕분에 웃음을 되찾았다. 비가 오는 날도, 아픈 날도 다 괜찮아지는, 좋은 추억으로 바뀌는 마법이 우리집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