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는 이사 예정일 4일 전에 출산을 했다. 우린 시댁에서 어른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우리가 자는 방에 에어컨이 없었다. 폭염을 피해서 만삭의 나를 배려하여 임시적으로 분가를 한 상태였고 당시 겨우 결혼 일 년 차였던 나는 시댁에서 첫 출산을 하고 싶지 않았다. 계획적으로 이삿짐 꾸리기를 미루며 부디 첫째 뉴키(태명)가 이사 전에만 나와주길 바라고 있었다. 이사 전에 낳는 것이 목표였던 나는 출산 전날까지도 빗길을 헤치며 3시간을 걸었다. 겁 많고 고집도 센 아내로 인하여 남편은 아빠가 된 기쁨도 잠시 출산 현장을 떠나자마자 홀로 이사를 해야 했다. 원룸이었고 식구가 늘어난 지금에 비하면 두 사람 몫의 침구와 옷가지 몇 개가 전부인 단출한 짐이었을 테지만 생애 최초로 아기를 맞이한 대사건과 이사를 같이 하는 것은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다행히도 미국으로의 이사 5달 전에 출산할 수 있었다. 물론 생후 6개월도 안된 아기와 아직 어린 첫째를 데리고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이사하기는 만만치 않았지만 나는, 그리고 특히 남편은 도착해서 낳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우리 부부에겐 첫째, 둘째 아이 모두 미국에서 낳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우리만의 신념이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는데 셋째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 신념은 중요했고 감사하게도 계획한 대로 셋째 아이도 주셨지만 문제는 셋째 만날 날이 또 이사와 겹치는 거다. 미국에서 출국할 무렵 나는 출산 두 달 전이었고 한국에 돌아와서 출산 전인 두 달 안에 이사를 해야 했다.
거듭된 출산과 이사의 반복으로 결혼 생활 대부분이 출산하거나 이사 중이었던 우리는 이제야 감을 잡았다. (결혼 첫 5년간 가히 무한 방 빼기의 실행이 아닐수 없었다.) 셋째 출산 전의 이사는 좀 더 치밀한 계획이 필요했다. 우리가 입국했을 당시엔 이미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입국자들의 14일 격리 기간이 있었다. 평소 꼼꼼한 성격인 남편은 이 2중 동안 거의 매일 하루 7시간을 투자하여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기존에 타던 세단 대신 유아용 카시트 3개가 들어가고 (우리도 탈 수 있는!) 깨끗한 중고차 또한 열심히 알아보았다. 첫째, 둘째, 나와 뱃속의 셋째는 방에 스스로 갇힌 아빠와 남편을 해가 져야 볼 수 있었고 2주 자가 격리가 끝날 무렵 미국에서 태닝 된 피부가 금세 허옇게 돌아와 버린 남편 얼굴을 볼쯤에 우린 시차를 적응했고 남편은 집 몇 군데와 차 두 대를 찾았다. 남편은 자전거를 사면 누가 공짜로 주는 것을 그냥 타거나, 자기가 나사 하나까지 사서 만들거나 모 아니면 도의 성격이다.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될 각오를 해서인지 이번 이사와 차량 구입건만큼은 후자인 슈퍼 꼼꼼 모드를 가동한 것 같았다. 2주 만에 자가격리 중의 솔로 자가격리를 마친 남편은 서울 경기 지역 아파트 매물만 취급하는 준 부동산 전문가이자 기아 자동차 딜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두 번째 집을 보고 여기다, 하고 도장을 찍었고 차 역시 시승식 따위 없이 이거다, 하고 역시 사인했다. 고생은 남편이 다 하고 방아쇠는 내가 당기는 식인데 이번 역시 과장이 아니라 집 계약하고 차 구입하는 데까지 만 48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평소에도 재채기처럼 빠른 판단을 (대부분은 실수지만) 하던 나는 이번엔 더욱 지체 없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세 번째 출산은 경산이라 언제 나올지 모르는 긴박함이 있었고 여차하면 또 이사하다 출산할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게다가 우리 집안의 컨트롤타워인 남편은 떼로 날아드는 비행기 같은 아이들과 뱃속의 아이, 그리고 이사 또 이사로 인해 평소와 달리 결단할 의지를 상실해 보였다. 그나마 다행히 출산 보름 전, 이사할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2주 동안 우린 신나게 바빴다. 그동안 가정 보육하던 큰 아이와 둘째 어린이집을 따라다니며 적응시키고 이삿짐을 풀고 쓸고 닦기를 무한 반복했다. 난 첫째 출산 때처럼 더 이상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3시간씩 걷거나 계단을 오르락거리며 가짜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됐다. 우리 부부는 이사한 지 13일, 출산 전날에서야 둘이 앉아 오랜 산행을 마친 행려들끼리의 첫마디를 나눴다. -수고했어. 앞으로 더 수고해. (토닥토닥. 어깨 툭툭)
이 모든 수고가 불과 17개월 전의 일인 것이 꿈만 같은 것이 우리가 결혼 이후 한 곳에 가장 오래 머문 기간이기 때문이다. (본가에 살 때도 한두 달이 멀다 하고 다른 지역에서 여행을 겸해서 살다 왔었다.) 우린 다가오는 봄이나 여름 다시 짐을 쌀 계획이다. 넷째가... 아니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기 때문... 휴, 둘 다 농담이다. 우리 가족이 선택적 난민이 되어 떠도는 동안 우린 다른 집들에 비해서 쌓아두는 짐이 줄었고 한정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진짜 필요한 물건은 거의 없음을 깨달았다. 다만 거듭되는 이사를 하는 동안 식구가 늘어나는 매직을 통해서 서로를 향한 사랑과 존중만큼은 여기저기 풀어놓고 살길 약속하고 다짐하며 산다. 아직 영하 기온이 한창이라서 겨울 옷을 입지만 아이들마다 오늘 입었던 옷을 올 가을과 겨울에 입을 수 있을지 가늠해보며 처리 여부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역시 다시 입을 옷보다는 작아지거나 헤져서 나눠주거나 버릴 옷들이 더 많았다. 결국 아이들도 우리 부부도 옷들처럼 완전히 지붕 밖으로 나가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마지막 이사를 위해서 오늘도 마음의 짐을 풀고 버리고 새 마음을 챙긴다. (#출산 빼고 이사만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