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자기기를 한번 사면 아주 오래 쓰는 편이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전자기기라곤 전자레인지 외엔 쓰는 법을 잘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아서 그만큼 잘 고장내고 고장 난 대로 쓴다. 낸 돈 주고 처음 산 카메라는 10년 정도 쓰다가 아이 낳고 장롱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10년 이상 쓴 애정 하던 노트북도 작년에 큰 수술을 받고 18만 원이라는 수술비까지 치렀지만 지난달에 사망선고를 받았다. 결국 급한 대로 당근 마켓에서 중고 노트북을 구매했다. 중고로 노트북을 구매한 경험은 이렇다. 집안의 대부분의 필요한 물건을 내가 구매하지만 남편이 도맡아 사는 것들이 있다. 전자기기와 아이들 기저귀, 그리고 고기. 일명 남편의 구매 목록 ‘the three 기’ 되겠다. 남편은 이 세 가지 품목은 인터넷 8대 마켓 및 중고시장 가격, 용량 사양 재질, 을 잘 파악하고 있다. 고기는 대형마트와 동네 마트의 가격 및 품질을 섭렵하고 있다.
여보 나 다음 달부터 수업이야. 이제 필요한데, 했더니 오케이 가자 당근. 하더니 그 자리에서 괜찮은 노트북 몇 개를 뽑아냈다. 이 가격이면 새로 사는 게 낫겠어하면서 아마존과 국내 온라인 마켓도 둘러보는 동안 나는 들뜬 마음을 누르며 남편이 바꾸는 컴퓨터 화면을 넘어다 봤다. 나의 충실한 대리 구매자는 내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가벼우면 좋지? 아니 집에서만 쓸 거야. 모니터 크기는 큰 게 좋겠지? 아니 여태 쓰던 것도 13인치였잖아 그 정도면 돼. 안 답답해? 어 전혀. 우리 집에 티브이가 없기 때문에 남편은 노트북으로 주로 영화나 티브이를 보기 때문에 내가 작은 모니터를 선호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큰 걸로 사지? 하며 회유하려는데 여보가 보기에 가격 좋고 고장 안 난 거 있음 그걸로 해. 난 영화는 여보 걸로 보니까 흑백이어도 돼. 했다. 남편은 사양과 사진을 정성스럽게 올려놓은 물건 하나를 보여줬다. Asus브랜드, 아이디나 문체로 봤을 때 40대 남자분으로 추정되는 (추리물 좋아함, 나중에 보니 내 말이 맞았음) 판매자가 문서작성용으로 주로 썼다는 노트북이었다. 뭐 7만 원? 진짜 가격 괜찮네? 남편 왈, 가격 비교해서 사양이 훌륭해. 판매자는 컴퓨터 사양이나 사진을 자세하게 직접 쓰고 찍어서 올려뒀다, 사는 사람 입장에서 특히 컴 알못인 나 같은 사람은 자기 물건에 대한 애착과 고증이 가능한 판매자를 신뢰한다. 나는 판매자의 꼼꼼함이 마음에 들었고 사양은 읽을 줄도 모르기에 컴퓨터의 몸체와 키보드 색이 같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응응 이걸로 사자, 꼼꼼함이 무기인 남편은 사진을 확대해서도 보고 다른 노트북과도 열심히 비교를 하더니 여보 근데 이거 7년 정도 됐네? 너무 낡은 거 아니야? 했지만 나는 성실하게 사용 이력을 적어놓은 판매자에게 이미 마음으로 송금한 이후였다. 이거 진짜 괜찮은데 하고는 내 큐사인에 남편이 바로 거래를 시작했다. 다녀올게, 바람같이 노트북을 사 가지고 온 남편은 노트북과 충전기, 그리고 덤으로 주셨다는 마우스가 든 하얀색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켜 보자. 나는 신났다. 노트북을 꺼내들던 남편이 음. 좀 무겁네? 남편이 쓰는 노트북은 겨우 몇 그램이라는 바로 그 노트북이라서 남편 손에는 유독 더 무거웠을 거다.라고 생각한 나는 노트북이 내 손에 건너오는데 떨어뜨려서 발등을 찍을 뻔했다.... 나는 “괜찮아. 아이들이 못 던지겠어.”라고 웃었다. 충전기는 판매글에 쓰여 있듯이 110 볼트용 아답터가 같이 있었다. 솥뚜껑, 아니 노트북을 열자 전에 쓰던 노트북과 달리 넓은 키보드판이 나를 반겼다. 타타 타타 쳐보니 묵직하게 눌러지는 게 꼭 피아노 같았다. 와 타자기 같아!! 남편은 투박한 모양새에 내가 실망할 줄 알았는지 괜찮아? 하고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한참이 지나서야 화면이 켜졌다. 이때부터 우리는 웃기 시작했다. 구동이 느린 것 같아. 어랏 이게 안되네. 하면서 남편은 이제 아랑곳없이 대놓고 말을 한다. 그러다 갑자기 남편이 내 늘어난 허릿살만큼이나 두꺼운 노트북의 옆구리를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와 이거 설마 CD롬이야? 그 말에 나는 너무 기뻤다. 여보!! 나 시디롬 진짜 좋아하잖아! 요새 차에도 없는 이 귀한 게 이렇게... 이제 이승환 시디 들어볼 수 있겠네, 하고 바로 앞에 있던 고등학교 때 베프에게 받았던 (베프가 환님 팬이고 나도 한동안...) 이승환 콘서트 시디를 넣어봤다. 시디를 넣고 돌아가는 동안 우리 두 사람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너무 커서 웃었다. 조금 과장해서 그 사이에 막둥이 밥을 먹였다. 한참만에 화면에 십여 년 만에 보는 플레이 팟 화면이 뜨고 콘서트장의 함성소리와 함께 이승환 콘서트가 생중계되었다. 오래된 노트북치곤 정말 사운드가 좋아서 놀랐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노트북 전원을 켜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옆에 있던 남편에게 말했다. “오래 걸리는 게 단점만은 아니야. 이것 봐 루틴을 만들어주잖아, 전원 누르고 화장실 가기. 잘 샀어. 고마워 여보. 타자기 같고 타타탙타” 피아노 치듯 노트북을 연주하는 시늉을 하며 앞으로 10년을 함께할 친구를 격려해줬다. 근데 너 아직 안 켜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