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한 어부가 자기가 잡은 청어를 최대한 싱싱한 상태로 항구에 운반하고 싶었다. 그러나 청어를 잡고 수조에 담아 항구로 오는 동안 다수가 죽고 만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수조 안에 메기 한 마리를 넣는 것이었다. 그러면 청어들 몇 마리는 희생하나 대다수의 메기는 이리저리 메기를 피해 다니다가 항구로 신선하게 살아서 도착한다.
대학을 2002년 졸업하고 취직이 쉽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공무원 시험을 권유하는 동료의 말에 생전 처음 행정학, 행정법 책을 펼치게 되었다. 난생처음 대하는, 특히 행정법에서 생소한 법률용어를 대하면서 어쩌면 말장난 같으면서도 묘한 해석학적인 카타르시스와 공복(公僕), 공공사회의 심부름꾼이라는 정체성이 크게 와 닿았다. 책을 읽다가 가끔씩 크게 보이는 단어들이 있는데 그때 내게 가장 크게 다가온 단어는 공복이었다. 그래서 주경야독을 하면서, 휴가 때도 도서관을 갔고 새벽 2, 3시까지는 공부를 하고 낮에는 일을 다녔었다. 전혀 피곤하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하는, 사서 하는 고생이었으니까. 회사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현장 사람들에게 일적으로 인정받았었고 새벽까지 공부한다 하여 지각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이 글의 제목이 말해주듯 첫 해 첫 공무원 시험에서 쓴 잔을 마시고 불현듯 아무 생각 없이 혼자 울산에서 버스를 타고 부산 해운대를 찾아갔다. 심장소리 같은 파도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는데 아주머니 한분이 걸어 다니면서 맥주캔을 해안에서 팔고 계셨다. 한 캔을 사고 -안주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모래사장에 앉아 홀짝홀짝 마시는데 그때만큼 힐링이 되는 순간이 아마 없었을 게다. 그래서 다음 시험에 떨어졌을 때도 해운대를 찾아 혼자 벤치에 앉아 청승맞게 맥주를 홀짝였지만 첫 해 그 느낌을 재연할 수는 없었다. 같은 상황이었지만 그날은 첫 시험 결과였고 혼자 바닷가에 앉아 술을 마시는 경험은 아마 두 번째보다는 처음의 감흥이 더 있었을 게다. 아니면 첫 시험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두 번째 시험의 실패가 내게 더 큰 두려움을 안겨줬기 때문일거다. 처음의 실패는 그래도 희망을 남기지만 두 번의 실패는 두려움을 고착한다.
메기 이론은 적당한 자극, 스트레스는 단체에 오히려 효율적이라는 경영용어이다. 그 예로 가구계의 공룡 '이케아'의 국내 진출이 국내 가구업체들의 실적을 호전시키는 현상을 들고 있으며 K BANK의 경쟁사의 인재를 영입하는 행위 -실제로 은행업계에서 타사 인재를 스카우트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한다- 등이 그 예이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자주 인용했다 하나 사실 과학적 근거는 희박하다. 그 반대 사례도 많으며 경영진, 즉 기득권층의 하위계층에 대한 억압을 포장하는 이론으로 써먹기도 한다. 그 반대 이론이 윔블던 현상으로서 경영상으로 따지면 외국계 기업이 개방된 시장을 석권하는 현상을 말한다. 윔블던 선수권 대회는 영국에서 열리지만, 외국 선수들이 주로 활약하는 데서 유래하였다. 즉 무엇이 문제이냐? 수조 안에 몇 마리의 메기가 임계치인가 하는 것이다. 또한 각각의 메기가 가진 식욕, 공격성도 측정해야 할 것이며 배가 항구까지 오는 기간, 청어의 스트레스 지수는 또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등등의 문제가 남는다.
윔블던 현상
두 번의 실패와 함께 나는 세 번의 실패도 맛보았다. 아니 햇수로는 3년이나 횟수로는 여러 번이었다. 그때마다 해운대를 찾지는 않았다. 내가 3년의 기간을 둔 것은 3이라는 숫자가 주는 완결성 때문이었다. 나의 공복으로의 도전의 임계치는 3년이었다. 그이상의 도전은 내 귀에 캔디가 아닌 내 머리에 너무 많은 메기이다. 처음 시험을 시작한 것은 취업에 대한 나름의 두려움과 희망이었을 것이고 차츰 공복이란 단어가 나에게 주는 희열로 바뀌었으나 계속된 실패는 차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실제로 제일 처음 친 시험 점수가 가장 좋았다. 시험은 실력과 함께 운이라는데 곧 그러한 운을 만드는데 내가 일조하여 떨어짐에 대한 두려움이 나의 운을 저하시키는 기제로도 작용했을 것이다. 무패의 챔피언이 한번 패배의 두려움을 알게 되면 연패를 하게 된다. 두려움을 알게 되는 순간 두려움이라는 마음속의 괴물을 키운다. 그 괴물은 아마 뿔이 두 개고 얼굴은 붉고 검은 날개가 달린 이무기일게다. 사람은 상상이란 무기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지어내고 이야기는 항상 위기와 함께 한다.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해피엔딩 혹은 새드엔딩이 된다. 누구나 해피엔딩을 원하나 현실은 새드엔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무지는 두려움을 낳고 키운다. 두려움은 실체가 없으나 인간의 상상이 실체를 만드는데 보통은 부정적인 느낌을 말한다. 뇌에는 아미그달라(amygdala)라는 부분이 있는데 우리말로 편도체라고 한다. 공포를 관장하는 신경이다. 이 아미그달라를 제거하면 쥐가 고양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적당한 두려움은 육체를 지닌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다. 반면 이 아미그달라가 과잉이 되면 자기 보호 본능이 강해진다. 생존, 자기애(ego) 특히 자아, 몸에 대한 집착이 강해진다. 에고를 검색하면 정신분석이론에서 '자기' 또는 '나'로서 경험되며 지각을 통해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인간 성격의 일부분이라고 설명한다. (다음 백과사전) 그래서 외부세계에 집착하고 진정한 내면세계를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 스트레스, 적당한 자기애란 과연 무엇이냐? 무지는 두려움을 키운다. 보통 두려움에 대한 인간의 방어기제는 두 가지. 회피와 대면하기이다.
빨간 부분이 아미그달라이다
시험에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나는 어떻게 대했을까? 지금이야 이렇게 담담하게 그때를 풀어나가지만 그때는 정말 몰랐다. 가장 가까운 방어기제는? 술이었다. 그리고? 여행이었다. 3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나는 더 이상 불합격을 회피하고 싶었고 더 이상의 도전은 무의미하다고 나와 대면하였다. 그에 따른 나에 대한 적절한 보상은 나에 대한 휴가였고 그때 홀로 떠난 해외여행을 잊지 못해 마흔이 지난 지금도 여행을 다니고 있다. 더 넓은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고 더 넓은 생각의 틀을 갖게 되었고 그때보다는 나의 무지를 조금 줄여나가게 되었다. 언제나 경험이란 좋은 스승이다. 경험이란 기억의 축적인데 기억이란 언제나 과거에 기반한다. 한번 어떤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면, 한마디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게 되는 것이다. 뇌에서 생화학적인 알고리즘으로 인해 과거의 기억이 두려움이란 괴물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현재나 미래에 대한 지향성을 방해하는데 그 틀을 깨야지만 좀 더 나은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낸다. 무지는 두려움을 키운다. 그래서 언제나 그 두려움의 실체를 마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떠한 방편이 생긴다. 그 두려움을 받아들일 것이냐 회피할 것이냐. 첫 여행을 하면서 가이드 없이 혼자 할 때의 약간의 두려움은 설렘이기도 한데 그 두려움 반 설렘을 받아들이면 다음이 훨씬 쉬워진다. 항상 실패는 두렵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또 다른 도전을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하고 있다.
앞서 얘기했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금방 잊기도 하지만 사실 표면 의식은 망각해도 잠재의식은 잘 잊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오래된 기억의 편린이 때로는 두려움으로 잠재의식으로 감추어져 있다가 순간 표면 의식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일상의 생활에서도 평정심을 가져야 한다. 호흡을 길게 하란 것도 그런 의미이다. 1분에 사람들은 평균 18회, 코끼리는 평균 10회, 악어와 거북이는 4회의 숨을 쉰다. 평균 호흡수는 수명과 관계가 깊다. 뜬금없지만 사실이다. 호흡을 길게 함으로써 생명에너지를 상승시키고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명상을 하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두려움, 스트레스가 두렵다면? 명상을 하라! 실패 또한 마찬가지이다. 4차 산업에서 중요한 기술인 인공지능을 완성하기 위해선 빅데이터의 축적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데이터의 효용은 그것이 실패사례이든 성공의 사례이든 중요하지 않다. 결과보다 과정에 더 중점을 두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은 모든 빅데이터의 학습을 통해 인공지능을 완성할 수 있다. 당신에게 축적된 모든 경험의 완성은 실패의 경험 또한 포함한다. 그러므로 실패를 두려워 말고 행한다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그리고기실 모든 인류의 근원적인 두려움은 죽음인데 삶의 과정에서 축적된 모든 실패와 성공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과정으로서 우주에 기록되고 죽음 이후에도 순환과 진화에 있어서 소중한 빅데이터가 된다. 영혼의 존재유무에 관한 논쟁에 앞서서 헛된 삶과 죽음은 없다. 신은 주사위놀음은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고전역학에 대한 양자역학의 도전은 눈에 보이지 않은 미시세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삶을 결과가 아닌 순환의 과정으로보고 보이지 않는 죽음이후의 세계를 이해한다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