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복이라곤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는 것이 몸이 성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그래도 초긍정 마인드로 장착하여 항상 자신이 복이 많은 사람이며 '이~~ 만하면 잘 살았다'라고 주문처럼 되뇌인다. 옆에서 듣기도 보기도 민망한 건 상대방의 몫일 정도로 과장스러워 보인다.
박여사(나의 친정 엄마)
50여 년 전에 헤어지고 소식을 몰랐던 여고 동창과 연락이 되었다. 밴쿠버 바로 밑의 시애틀에 살고 있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살았다가. 통화가 되자마자 첫마디가 너네 친정엄마는 어떻게 되셨나는 질문이었다.
돌아가신 지 10년이 좀 넘었는데 79세에 돌아가셨다니 깜짝 놀라는 듯했다.
중학생 때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친척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병원으로 가시던 모습을 봤다고. 그랬다. 그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원을 하셨다.
그 친구가 그 모습을 기억하면서 금방 돌아가실 줄 알았다고.
그런데 그 이후에 40년도 더 사시고 증손자 첫돌까지 차려주시고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 원인 불명으로 하혈과 기운이 없으니 먹어야 된다고 밥을 자꾸 먹으니 비만이 되어 겨드랑에 계란 같은 지방덩어리가 생길 지경이었다.
한약으로 안 다스려져서 입원을 하니 당뇨에 고혈압 진단이 나왔다. 하혈은 그 당시 여성전문 병원이던 제일병원에서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초등학교에서 돌아올 때 하늘의 구름 모양이 무서우면 엄마가 돌아가셨지나 않나 불안해했다. 집에 오면 선지가 섞인 피가 가득 찬 대야를 들고나가는 일하는 언니를 비껴가면서 흰 창호지로 얼굴을 덮은듯한 창백했던 엄마의 얼굴.
명의를 만났다고 일생 고마워하던 우석대학병원(지금의 고대병원)의 처방과 식이요법으로 펄펄 날며 황소 기운으로 산더미 같은 나의 큰 애 기저귀를 빨아주셨다.
손수 한약을 지어다가 연탄난로에서 불조절을 하며 한약을 달이던 부친의 정성과
동네 어귀에서 부터 은은하게 풍기던 탕약의 약초 냄새가 마치 생명의 향기인양 큼큼하며 집에 오곤 했다.어린 마음에 엄마병이 그 약으로 다 떨쳐나가기를 빌고 또 빌었다.
인생에 반전이 없다면 희망도 뭣도 없는 암울함 자체이며 오아시스 없는 모래사막이리라.
흰쌀밥 한 톨도 안 드시고 깡보리밥에다 삶은 야채에 오이와 우유, 치즈, 살코기, 콩물등 지독한 다이어트와 명의의 처방전으로 당뇨약, 혈압약도 안 드시고 79세까지 사시다가 집에서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
마지막 우석대학 병원행에서 부친이 '저 어린것들 두고 어떻게 눈을 감냐'라고 하신 것을 멋지게 뒤집은 우리의 박여사.
19세에 평양에서 피난 온 실향민으로서 절대 비관이 없고 한 번도 '아파서 죽겠다'혹은 '죽고 싶다' 라는말을 실수로라도 입밖에 낸 적이 내 기억으로는 없다.
지독하던가 인내심과 책임감이 강하던가이다.
어려서 별명이 '명랑이'여서 그랬는지 항상 소녀처럼 깔깔 웃고 그렇게 아파도 살림을 흐트러짐 없이 하셨던 기억이 난다. 늘 어지럼증에 시달리시면서도 나의 어릴 때 친구들도 우리 집에 오면 항상 정돈되어 있고 내가 숙제를 할 땐 항상 앞에 앉아계셨다나. 부친도 아이들이 집에 올 시간에는 꼭 집에서 아이들을 맞아야 한다는 엄명을 내리셨으니.
손이 얼마나 매운지 돈을 잘 모으셨다가도 딸들이 뭐가 필요하다 하면 아낌없이 사 주셨다. 밴쿠버에서 외롭지만 고통 없이 가신 지가 벌써 13년이 지났는데 그렇게 아프면서도 절대 얼굴 한번 안 찡그리고 명랑하게 사셨다는것이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전지현보다 더 예뻤던 박여사, 최여사
최여사(나의 시어머니)
시아버지 강 씨, 시어머니 최 씨.
그 자손들은 최. 강이다.
안, 강, 최 씨 순서대로 지독하다는데.
지독은커녕 세상에 이재에는 관심 없는 선비 스타일 집안이다.
그중에서 시어머니가 제일 똑똑하시고 야무지셨다. 집안 살림을 이끄시는 여장부이며 어찌나 힘이 좋으신지 지치지도 않으셨다. 3남 3녀와 그득한 손주들을 보시고
93세에 낙상 후 3개월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앞의 박여사가 명랑소녀이면 최여사는 초 초 명랑소녀이다. 항상 명랑하시고 목소리도 쟁쟁하시고 어떤 어려움에도 끄덕도 안 하신다.
겨울에 그랜드캐년 가는 길을 운전하면 가슴이 조이는 제 최여사는 모험을 즐기듯 재미있어하신다. 담력이 세고 두려움이 없는 뱃장. 88세에 우리가 살고 있던 이스탄불에 오셨다. 인천공항부터 휠체어 서비스를 받으시고. 옛날부터 한쪽 다리를 못 쓰셔서 집안에서도 화장실 갈 때에도 한 손으로 벽을 짚고 깽깽이 발로 가시는 형편에.
이스탄불의 '베벡'이란 동네에는 해변에 위치한 레스토랑이 많이 있다. 바다뷰를 보게끔 물가에 바짝 맞대어 지은 식당은 출입문이 홀보다 높아서 계단으로 내려가야 테이블이 있다.
평지도 못 걸으시는데 계단이라니하고 난감해 있는데 직원 둘이 와서 시어머니를 의자에 앉히더니 양쪽에서 의자 팔걸이를 잡고 계단을 내려가서 테이블까지 옮겨주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아무리 아들이 보고 싶어도 비행기 타고 서울에서 이스탄불까지 올 엄두도 못 낼 것이다.
초 명랑, 초 긍정, 초 담력을 고루 갖추신 최여사는 사랑과 인정이 넘쳐서 웃기도 울기도 잘하셨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애드빌로 사시면서도 손주들을 보시면 없던 기운도 나신다고 했는데 이미 이 땅에 안 계신다.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장인으로 살아내시고는.
두 어머니 카테고리 중에 나는 어디에 속하는지 맞춰보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박여사의 인내심이나 끈기는 약에 쓸래도 없고 쉽게 싫증내고 기분에 좌우된다. 깡이 없고 소극적이라서 학생때돞반장을 하라면 꽁무니를 빼고 겨우 부반장만 하며 앞에 나서길 꺼려했었다.
그래도 닮은 것이 있다면 음식에 손이 큰 것과웃음이 많은데 요실금 오기전에 많이 웃어야하나 고민중.
워낙 업힐이 많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차의 가스는 떨어져 가는데 내리막길은 안 나오고 계속 올라갈 때 조마조마했던 쓸데없는데 조차도 콩알만 한 간.
최여사의 사교성의 발꿈치도 못 따라가며 지독한 근성은커녕 포기가 취미인 나를 돌아보면 한숨만 나온다.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고 고상해지기 보다는 오히려 더 고약해 지는것 같다.
까칠해지고 말 한마디에 욱하며 포용력은 더 수치가 낮아지는것 같아서 난감하다.
우리 세대들이 처절한 사춘기를 겪지 않고(등짝 스매싱) 고분고분 순종하며 살다가 나이 들어서 오춘기가 되면서 본성이 나오는것이 아닌가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삐지는 것을 보면 여중생들 보다 더
유치하게 논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고 두 어머님 타입을 보면서 아프고 또 아파도 항상 명랑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숙명을 끈기 있고 엄숙하게 완수하고 있는 모든 아픈 이들을 보면서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나뿐만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도 이런 불굴의 의지를 가진 타입의 백퍼 도플갱어가 되기 쉽지 않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