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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Oct 23. 2024

남자가 사랑할 때, 여자가 헤어질 때

누가 누가 더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아야 한다는 명제하에 결혼한 옛사람들의 삶은 과연 어땠을까?

결혼 적령기가 되면 집안 어른들이 주선해서 중매쟁이가 집에 드나들면서 혼기에 찬 아들 딸들을 거의 치우기 수준으로 혼사를 치른다. 왜냐하면 밑으로 동생들이 줄줄이 있어서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하지 않으면

집안의 위계질서가 무너지는 건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도 신랑 사진이 오고 가고 하다가 길거리에서 몇십 년 만에 만난 친정엄마의 교회 성가대를 같이 했던 친구를 우연히 만난 것이....

같은 이북 출신의 피난민 자녀이며 신랑 나이가 4,5세 연상이 대세이던 시절에 5세 차이가 나는 신랑감이 따악 나타났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근무하는 것이었다.

결국 하이드 팍의 넓은 잔디밭에서 찍은, 그런데 발 밑은 잔디가 아닌 덤불이 있는 게 이상했지만 에잇, 뒤의 광활한 공원의  아름다운 모습에 홀려서 편지를 주고받은 지 8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으니 참 기괴하도다.

양가 부모님과 연년생 시누이 세명을 다 만났다. 시누이들이 어찌 인형같이 다 예쁜지 놀라면서 남편감도 곱상하고 얌전한 사진 속의 인상이 약간 더 호감이 갔다.

 

신랑감이 귀국하는 날에 친정엄마랑 김포 공항에 꽃단장하고 나가서 8개월의 편지와 감질나는 국제 전화를 마감하고 실물영접을 하는 장면이었으니.

얼굴은 금방 알아는 보겠으나 이상하게 납작하고 똥똥한 인상?

얼결에 만났다 헤어지고 그 담날부터 결혼 준비를 해서 2일에 만나서 같은 달 28일에

집 근처의 영빈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을 가야 되는데 신랑이 파리에서 소매치기를 당하면서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제주도를 못 갔는데 아직까지도 제주도를 못 가본 사람이 되었다.

결혼식 전에 친정에서 슬쩍 '신랑 키가 작아서...'라며 내 눈치를 살피더라.

난 키 크고 싱거운 사람이 싫던 터라 작고 야무진 타입을 좋아해서 별로 문제 삼진 않았는데 이북식 표현으로 키 작은 사람을

'땅에서 돋아나다 말았다'는 말을 하는데 나는 귓등으로 흘렸을 뿐.


사람들이 자기가 보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만 본다. 눈에 콩깍지가 씌우면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신세를 망치기도 한다.

내 사촌도 집안이 쫄딱 망한 터라 데이트 비용이 없어서 처음  만나는 아가씨랑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한 그릇을 시켜 주었더니 너무 검소하고 경제관념이 철저해서 저런가 보다 하고 급 호감을 가져서 결혼하고 나니

주머니를 털어도 먼지 밖에 안 나오는 비렁뱅이였다는 후일담을 하던 올케가 지금까지도 남편을 노숙자 안 만들고 잘 살고 있다. 가난한 게 죄는 아니지만 돈 욕심이 없는 것은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물론 욕심낸다고 다 잘 사는 건 아니지만.

나도 신랑이 작달막해도 다부져서 악착같이 재정도 다부지게 만들 줄 알았는데 선비 타입에 물질에 대해서 초월한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그저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있을 때 주변에 잘하자 주의였다.

그렇다고 내가 악착같고 알뜰해서  탈탈거리면서 한 푼 두 푼 모으는 타입도 아니었다. 맏딸로서 뭐 하고, 사고 싶다 말만 하면 미리미리 사주는 환경에서 자라서 스포일 되었으니 무지 막지 한 돈복이 없는 한 부를 쌓지는 못하는 부창부수였다.


결혼생활 동안 단 한 번도 남편이 나한테 돈을 많이 쓴다던가 아끼라는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이 헤픈 와이프는 손만 클 뿐 아니라 남이 하나를 주면 두배로 갚아야 잠이 오는 여자이니 지금까지 밥을 굶지 않고 살아온 것이 기적이다.

이민을 와서나 IMF가 나거나 시부모님이 94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용돈을 드리는 것이 아깝지 않은 것은 다행이나 돌아가신 후에 더 못 해 드리고 야박하게 굴었던 것도 후회가 되는 차남 며느리였다.

심장에 불이 날 정도로 열심히 살지도 못했고

아들 둘을 키우면서 너무 먹기만 하고 느려서 등짝만 때려주고 지혜로운 엄마 노릇도 못했지만 아이들이 엄마를 미워하지도 무시하지도 않으니 천만다행이다.

남편도 시집에 하도 쉴드를 쳐서 착한 시누이가 '올케는 한 번도 시집에 와서 자고 간 적이 없다'라고 불평 아닌 불평을 했다는데 난 잠자리 바뀌면 못 잔다는 것을 아는 남편의 철없는 배려였을까나. 아이들에게도 무조건 엄마 말을 들으라고 훈육하고 내가 뭐 사고 싶다, 하고 싶다 하면 금방 오더하고 설치하고 그러다가도 몇 년에 한 번씩  중요한 일엔 꿈쩍 안 하는 쇠고집이 있긴 하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속 터진다.

또 은근히 까다로워서 여자가 집에서 바지 입는 것을 싫어하고 단추 있는 옷을 싫어해서

홈웨어는 무조건 치마를 입고 셔츠도 단추가 안으로 들어간 옷을 입곤 한다. 

히든 단추 옷 찾기 쉽지 않다


결국 나의 결혼 생활은 남편의 뼈를 깎는(?) 인내와 상대방에 대한 열린 마음 때문에 유지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예민하고 충동성 감정적이며 허세충인 나를 다 받아준 어느 한 사람의 노력의 결실이랄까?

남편의 6남매와 하나뿐인 내 여동생까지 7 가구 중에 우리 부부만 빼고 6 가구가 다 배우자가 먼저 떠난 외기러기들이 되었다.

남은 부부 주자로써 책임감을 느껴보지만 사람의 남은 생의 숫자를 누가 알랴.

그러니 서로 더 이해하고 아껴줄 수밖에.


서양사람들이 상대방에게 싫증 날 때나 신뢰가 깨졌을 때 구구절절이 이야기하지 않고 단 한마디, '행복하지 않다'이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에게 호감을 느껴서 접근할 때 흔히 쓰는 말은 '너는 대접받을만한 가치가 있다'이다.

위축되고 자존감이 떨어진 여자에게는 마치 사랑의 묘약 같은 말이다.

그렇게 결합을 하고 결말에 행복하지 않다는 말로 다 뭉개버리면 여자는 배신감에 몸을 떨면서 헤어질 수밖에.

주위에서 보면 남자가 여자를 더 좋아하면 문제가 적고 여자가 남자를 여보, 자기야 하고 엄청 좋아하면  여자를 약간 경시하는 언사를 종종 하곤 하더라. 위해줄 때 겨~~ㅁ손 하게 와이프를 위해 줘야 하는데 어리석게도 어깨뽕만 들어가고.


인생행로를 흑백으로 가릴 수는 없다.

사랑의 감정과 개념은 더욱 오묘해서 각자 맞춤형인 것은 다 아는데 어느 한쪽이 끈을 놓지 않고 부단히 노력한다면 좀 낫지 않을까 싶다. 결혼생활 48년의 고비고비를 넘으면서

기껏  정도만 깨달은 나의 혜안도 참 얄팍하구나.

어쨌든 인생이나 건강이나 다 개개인의 독특성 때문에 재단하기가 힘든 건 사실이다.


나의 서양 며느리가 한동안 한국 드라마에 빠져서 한국식 표현을 배우려고 애쓰더니 '애교'의 뜻이 재미있었는지  시아버지인 나의 남편에게 '어머니(omoni)는 언제 아버님께 애교를 부렸나요?'라고 물어보니까 남편 대답은 1초 만에

'뭔가를 사달라고 할 때'라고 대답하더라.

참고 참고 또 참다가.

둘이 둘을 더 낳아서 일가를 이루었다.

 젊은 엄마였을 때 내가 할머니가 되리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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