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도 몬트리올에 사는 큰아들네 가족 다섯 명이 크리스마스이브에 밴쿠버에 도착해서 크리스마스 당일에 모여서 반갑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5세, 13세, 11세의 아이들이 밴쿠버에 살던 때의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 때문에 우리와 함께 슬립오버할 스케줄이 다 취소되었다. 집에서의 식사는 10일 동안 딱 2번이라서 한식을 배 터지게 먹여 보내려는 나의 야심은 무너지고 말았으니...
큰 애가 점심을 산다고 약속을 잡자고 하는데
'그래 어디가 좋을까?'라든지 '메뉴는 뭘로?'라고 좀 쿨하게 말하든가 아니면 아들의 계획을 끝까지 차분하게 들어주든가.
외식하자는 말에 뒤에서 호랑이가 쫓아와서 도망가는 사람처럼 손사래를 치면서 반대를 했다. 요즘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에 덩달아 오른 외식 가격에 놀라서 겁에 질려 있는 중이라서나도 모르게.
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오늘 물건 값이 제일 싸다는 중남미의 어느 나라처럼.
우리 가족이 모두 모여서 식당에 가면 족히 300불~400불은 나올 것이다.
조금 쾌적한 레스토랑에 가면더 심할 테고.
그러면서 속으로는 '제일 싼 거 먹어야지'라고 다짐해 본다.
옛날 엄마들은 자식이 뭘 사준 다하면 비싼데 왜 사 오냐고 오히려 야단을 쳤고 한일관 같은 데서 식사 대접은 일 년에 한두 번 특별한 날, 대학 졸업식 같은 날에.
생신이야 몇 날 며칠 장만한 음식을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렸지, 외식은 거의 없었다.
재래시장에서 콩나물값도 흥정하던 알뜰한 어머니들 덕에 경제가 날로 번창하던 80년대의 엄마들 사이에 한동안 유행했던 말.
생선맛은 '어두일미'라고 남편만 주지 말고 엄마들이 먹어야 한다는 주옥같은 말이 떠돌았었다. 그즈음에 남편들도 자기 엄마 눈을 피해서 슬쩍슬쩍 부엌으로 들어와서 설거지도 하곤 했다.
내가 초등학생 때만 해도 첩 살림하는 아줌마들이 더러 있었다.
집은 셋방살이( 월세로 방 하나를 얻은)를 할 망정 외출할 때는 귀부인 못지않게 화려하게 꾸며서 다들 훔쳐보았다. 배불뚝이 장사꾼 사장은 마누라가 키 작고 인물이 없어서인지 늘씬하고 예쁜 첩에게 살림을 차려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시앗(첩)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 앉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옛날 할머니들은 어찌 그 꼴을 보고 참고 살았을까.
나의 중년 시절만 해도 돈푼깨나 있으면 바람날까 봐 부인들이 가꾸기 시작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고 과격한 부인은 첩까지는 아니라도 바람피운 상대에게 가서 난동을 펴서 망신을 주긴 했지만 이혼을 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부모와 자식들의 울타리가 있어서, 아니 그 울타리를 허물면 험한 현실과 마주할 능력도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리라.
요즘은 남편의 불륜을 눈치채는 날부터 몸과 마음은 매의 눈으로 변해서 증거 수집과 현장 검증까지 마치고 도전장을 내미는 시대가 되었다. 이혼도 이슈가 못 되는 세상이다 보니 부모들도 비혼을 찬성하는 추세가 이상하지 않다. 두 가정이 만나다 보면 성격이 괴상한 사람들이 꼭 한 두 명씩 있게 마련인데 결혼생활이 곁가지들 때문에 엉망이 되는 일이 있다 보니 결혼 생활의 본질이 흔들리기도한다.
물론 제일 중요한 배우자 간의 불화가 제일 큰 문제겠지만.
나는 아픈 것도 못 참고 아픈 사람을 돌보지도 못한다. 겁이 많아서 피만 보면 내가 먼저 자지러진다.
친정엄마가 돌아가셔서 장례식 때 시신의 반만 가리고 상반신만 보이게 된 상태에서 뷰잉을 하기 전에 한복을 입은 모친을 보니 캐나다 장례사들이 처치를 하고 한복 저고리의 고름을 리본으로 매어 놓았다.
한식 고름으로 다시 매려는데 겁이 덜컥 나면서 손이 떨렸다. 아무리 엄마라도 시신을 만진건 처음이라.
친구들 중에서 유난히 아픈 사람을 잘 보는 타입이 있다. 입안의 염증이 있다 하면 손을 넣어 소독도 해 주고 피가 철철 나는 상처도 처치를 해서 묶어주고 피고름뿐만 아니라 기저귀까지 갈아주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간호사 출신이 아닌데도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 넘쳐나서 그 힘든 일을 감당하는 게 아닌가 한다.
옛날 엄마들은 시부모 간병부터 자녀 중에 하나가 병이 들거나 사고를 당하면 정성과 기도로 돌보던 슈퍼 우먼들이었다.
대여섯 명의 자녀들의 도시락과 밥을 해 먹이고 세탁기도 없는 마당의 수돗가에서 산더미 같은 빨래를 다 해 가면서.
지금은 전기로 작동하는 이모들 덕에 살림에서는 벗어났지만 직장이라는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어 기름칠도 제대로 못하고 쉴 새 없이 돌아가야만 한다.
예전의 육체적인 힘듦 대신에 정신적 , 마음적의 피곤함이 가중되어 정신과 상담을 많이 받고 있다고.
그래서 외부에서오는 불쾌한 작은 자극에도 빨리 화가 나고 더 큰 쾌감이나 있어야 도파민이 나오는 멘털이 흔들리는 시절에 살고 있다.
몸이 너무 피곤해서 잠은 기절하듯 자고 새벽밥을 해야 했던 할머니들은 정신적 스트레스는 없어도 육신이 마모되어 50세만 되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버리곤 했다.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못 산다'라는 말도 아닌 것 같고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게 아니고 관절염이 온다'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쿨한 엄마는 아이들에게 좋은 기억을 준다. 자녀가 이야기를 하면 끝까지 들어주고 격려하며 그들의 의견이 스스로 결론을 내도록 유도한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요즘 정보 및 지식에도 못 미치는 신경질과 짜증이 섞인 엄마의 경험으로 이러쿵저러쿵할 필요가 없는데도계속 그러고 있다.
그저 옆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면서 뒤에서 잘 되기를 기원하는 엄마는 주위에서 한 명도 못 봤다. 나름 똑똑하다고 자부하면서 아이들을 좌지우지하려다가 당연히 뜻대로 안 되니까 애들보다 먼저 좌절해서 머리 싸 맨 채 눕고 의사한테 신경 안정제 받아오는 엄마들도 수두룩하다.
나라도 애들이 어디 가자, 뭐 먹으로 가자 하면 비록 헤비한 음식이라도 소화제 먹을 생각하고 토 달지 말고 얼른 따라 나서야지.
구구절절 이야기해 봤자 먹히지도 않고 계속 그러면 포기하고 절대로 어디 가잔 말도 안 하면 집구석에 박혀 있게 될지도 몰라.
지금이야 운전을 하니까 내 맘대로 다녀서 아직도 가족 왕따의 뜨거운 맛을 몰라서 까다롭게 노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