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각 수집가 Jan 28. 2021

일회용품 없이 장보기

신입 제로웨이스터의 일기장






제로 웨이스터로서 두 번째로 장을 보는 날이었다. 지난번 장보기에서 기대와는 다르게 속상함과 핀잔만 잔뜩 안고 왔던 터라, 발걸음이 가볍진 않았다. 오늘은 어떤 싫은 소리를 들을까 싶으면서도 장바구니 안에 꾸역꾸역 프로듀스 백과 밀폐용기를 챙겨 넣었다. 누가 뭐라 한들 유난스럽게 장 보기로 다짐했으니까 - 그렇게 다부진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오늘도 나의 목적지는 시장이다.



"너네 동네에 가면 뭐 있어?" 라고 물으면 "시장 있어" 라고 답할 정도로, 우리 동네에는 근사한 재래시장이 있다.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시장이 나오는데, 꽤 규모도 크고 깨끗하게 잘 되어있어서,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기 전에도 종종 들렀던 곳이다.



본격적으로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게 되면서 이제는 대형마트보다 시장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답답해 보일 만큼 꼼꼼한 포장재를 입고 진열되어 있는 대형마트와는 달리, 시장은 날것 그대로인 식재료가 많아서 내가 조금만 신경 쓴다면 버려지는 포장재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시장에서도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바로 '일회용 검정 비닐' 이다. 가는 곳마다, 사는 것마다 빛보다 빠른 사장님의 손 스킬로 검정 비닐에 담겨지기 때문에, 준비 없이 갔다가는 비닐 대여섯 장은 기본이다. 빠르고 쉽게 사용되었던 저 검정 비닐은 그동안 우리의 지구를 얼마나 시커멓게 오염시켜왔을까 -





지난주 첫 장보기 때 시장을 지나가며 눈여겨봤던 것이 있다. 바로 포대 한가득 담겨있던 '보리'. 우리 집은 평소에도 보리차를 우려먹어서 지인들 사이에서는 '물 맛집' 으로 불리는데, 지금까지는 보리차 티백을 사용해왔다. 냄비 한 가득 물을 담고, 그 안에 티백 하나 풍덩 넣어두면 몇 시간 사이에 구수한 보리차가 만들어지니 세상 편했었다.



하지만 이 '티백' 은 지구와 내 몸의 건강을 망치는 쓰레기였다. 티백은 곧 일회용 플라스틱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프리미엄 티백이라고 부르는 삼각형 모양의 티백은 100% 플라스틱 섬유로 만들어진다. 종이 티백 역시 소량의 플라스틱 섬유가 들어가기 때문에 안심할 수는 없다. 그동안 나는 구수한 플라스틱 물을 마셔왔던 거나 다름없었다. 마침 집에 있던 보리차도 다 먹어가던 참이어서 오늘은 티백이 아닌! 포장되어 있지 않은 보리를 사기로 했다.



기억을 더듬거리며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하던 찰나에 나타난 보리 가게. < 국산 보리 > 라고 큼직하게 쓰여진 종이를 보며 '혹시 비싸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세상에나 - 저렇게 한가득이 고작 삼천 원이란다. 가져간 밀폐용기를 드리며 "여기에 담아주세요" 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다 안 들어갈 텐데..." 라며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지 싶어, 장바구니 속 프로듀스 백을 바리바리 꺼내며 "이건 될까요? 이게 제일 큰 건데???" 하며 내밀었는데 다행히 오케이! 덤으로 한주먹 더 주시며 엄청 맛있을 거라고 하셨다. 신발 살 때 딸려온 주머니인데 안 버리고 모아두길 잘했다. 큰 사이즈가 마땅치 않아 챙겨간 건데 이렇게 사용되니 말이다. 





이번 주는 남편 생일 주간이다. 박서방 맛있는 거 해준다는 엄마의 꼬드김에 주말에는 친정에 가기로 했지만, 안 좋은 어깨와 무릎으로 병원까지 다니는 엄마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차려놓은 밥상만 먹는다는 게 미안해져 "내가 잡채 해갈게!! 나 잡채 잘한다!" 라고 큰소리치고 말았다.



내 잡채는 '부추 잡채' 라고 봐도 무관할 정도로 부추가 당면만큼이나 들어간다. 그래서 오늘은 부추를 꼭 사야 했다. 시장 끝자락에 있는 마트는 포장 안 된 야채가 많아서 좋은데, 부추는 늘 포장되어 있다. 혹시나 시장 야채가게에 포장 안 된 부추가 있나 요리조리 살폈는데 다행히 한 군데가 있었다.



몇 번 시도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프로듀스 백을 내밀 땐 괜히 설레면서도 긴장된다.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싶기도 하고.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인지 보리 가게에 이어 야채가게 사장님도 기분 좋게 받아주셨다. "요즘 일회용품 대체할 수 있는 게 많이 나오더라구요~" 라며 먼저 말을 건네시기도 했다. 쭉 둘러보니 여기는 거의 다 포장 없는 야채들을 판매 중이셨다. 심지어 느타리버섯도! 그동안 내가 봐왔던 느타리버섯은 네모난 플라스틱 통 안에 들어가 비닐랩을 덮고 있는 게 전부였는데, 이렇게 자유를 만끽하는 느타리버섯이라니. 앞으로 야채가게는 여기로 와야겠다. 





그리고 대망의 마트 타임이 돌아왔다. 당면도 사야 했고, 무엇보다 표고버섯을 필요한 만큼만 살 수 있는 곳은 여기 뿐이다. 마음 단디 먹고 오긴 왔지만, 지난주에 프로듀스 백에 담았다고 한소리 들었던 터라 문 앞에서부터 괜히 긴장됐다. 오늘도 핀잔주시면 한소리 해야지 다짐하며 들어갔지만, 사실 의외로 소심쟁이라 괜히 겁부터 났다.



카트에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담고, 마지막으로는 표고버섯을 담았다. 일회용 비닐이 아닌 내가 가져간 프로듀스 백에. 가격표를 붙여야 하는데 슬쩍 보니 지난번 그 아주머니다. 아 또 싫은 소리 듣겠다 싶어서 괜히 한 바퀴 빙 돌기도 하고, 포장된 표고버섯도 있길래 '그냥 이거 살까...' 싶기도 했다가 '아니지! 앞으로 계속 이렇게 장 볼 건데, 계속 부딪혀야지!' 하는 마음으로 위풍당당 내밀었다.



"안에 표고버섯이에요"

"비닐에 담아야 하는데...'

'무게 더 나와도 괜찮아요"

"근데 왜 여기에 담으세요?"



이때다 싶어 지난번 하지 못했던 말을 후다닥 내뱉었다.



"비닐은 분해되는 데 500년 걸린대요! 일회용품 줄여야죠"

"아 - 그렇지... 환경문제 심각하죠? 그래도 이렇게 실천하는 사람 드문데. 감사해요"



분명 지난주 왜 비닐 냅두고 엉뚱한데 담아 가냐며 핀잔 주시던 그분이다.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었고, 나는 기어이 비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지난주와 다르게 아주머니는 나에게 감사하다고 하셨다. 순간 갑자기 눈물이 핑 돌뻔했다. 이유는 몰라, 그냥 갑자기 그랬다. 내가 더 감사했다.





발걸음이 진짜 가벼웠다. 인식은 이렇게 조금씩 바꿔가면 되는 것이었다. 다음번에는 편한 마음으로 장 보러 갈 수 있겠다. 돌아오는 길에 괜히 기분이 좋아 꽈배기도 테이크 아웃했다. 당당하게 "여기에 담아주세요!" 라고 말하며 말이다. 뭔가 이쯤 되니 꼭 게임 속 퀘스트 달성하는 기분이다.





비록 무포장을 찾을 수 없어 파프리카와 애호박에서의 비닐이 생겨버렸지만, 그래도 나름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애호박은 포장을 줄일 순 없는 걸까? 하다못해 빵끈이라도 말이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일지라도 최소화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집으로 돌아와 장 본 것들을 정리하던 찰나, 어머님께서 오셨다.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들과 함께. 사실 말은 못 했지만 속으로 뜨악했다. 나름 열심히 일회용품 없이 잘 사 왔다고 스스로 칭찬 중이었는데, 어머님이 주신 검정 비닐 안에는 일회용 비닐에 담긴 옥수수와 양배추, 빨간 대야에 담긴 과일들이 잔뜩이었다. 심지어 저 빨간 대야는 포개진 것까지 총 4개. 잘 씻어서 과일가게 사장님께 드리면 받아주시려나? 재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다음번에는 어머님께도 말씀드려야겠다. 제로 웨이스트 함께 해보자고. 언젠가 < 며느리 따라 제로 웨이스트 > 라는 제목으로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래본다. 



2020. 3. 13. Fri



매거진의 이전글 소소한 변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