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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 수집가 Feb 01. 2021

대한민국에서 가임기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우리를 위한 임신인가, 타인을 위한 임신인가




어느덧 결혼 3년 차가 된 우리는 작년부터 임신을 계획했다. "우리 이제 아기를 갖자!" 라고 결심한 후로는 이것저것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물어볼만한 결혼 선배는 없었고, 엄마에게 물어보자니 부끄러워 입조차 떼지 못했다. 그때마다 맘카페의 선배 엄마들을 통해 소소한 팁을 얻곤 했다. 그러나 '계획 임신' 이란 모르면 모르는 만큼, 알면 아는 만큼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세계였다. 



'남편도 같이 엽산을 먹어야 한다' '운동을 해야 한다' '많이 걸어야 배란에 도움이 된다' '배란기에는 두유를, 착상기에는 포도즙을 먹어라' '관계 후 씻지 마라' '222로 달려라' '111로 달려라'



임신 생각은 없었지만 사람 일은 모른다며 신혼 초부터 함께 챙겨 먹은 엽산 덕분에 왠지 모를 든든함이 있었다. 내 기준에서는 나름 열심히 걷고 요가도 시작했으며, 배란기와 착상기에 맞춰 좋다는 음식도 구분해가며 먹었다. 배란일을 알아야 한다고 해서 매달 배란테스트기까지 사용했다. 처음 몇 달은 '임신이 뭐 바로 되겠어?'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점점 2-3달이 지나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임신을 계획한 지 4달째 되던 5월 - 내 생일을 기념이라도 하듯 기적처럼 선물처럼 아기가 와줬지만, 걱정 많은 예비엄마는 쓸데없는 걱정들로 며칠 밤을 지새우다 아기집도 보지 못한 채 보내줘야 했다. 이런 경우 '화학적' 으로만 임신이 된 상태라 유산 축에도 못 낀다고, 엄마의 잘못도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그저 건강하지 못한 약한 세포일 뿐이라는 산부인과 원장님의 위로에도 내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그날 버스 타고 서울까지 다녀오는 게 아니었는데. 차라리 임신을 늦게 알았더라면, 아무 걱정도 아무 생각도 안 했더라면, 평소처럼 잘 잤더라면, 밥이라도 잘 챙겨 먹었더라면, 그랬으면 달랐을까?



하필이면 그 주에는 남편의 사촌이 임신을 했었다. 온 가족이 모여있는 단체 카톡방은 축하 메시지로 떠들썩했다. '너도 빨리 가져야지' 라는 말과 함께. 가까운 사람의 임신소식과 축하, 너는 언제 임신할 거냐는 재촉은 이제 막 유산한 나로서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다들 내 마음도 내 상황도 모르면서.





계획임신 중인 여자에게 한 달 30일은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다. 생리가 시작되면 이번 달도 임신이 되지 않았다는 속상한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임신이 잘 되기 위한 몸' 만들기에 돌입한다. 배란에 좋다는 맛없는 약콩 두유까지 챙겨 먹으며 운동을 하다 보면, 며칠 지나지 않아 배란 테스트기의 기간이 온다. 몇 시간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채, 매일 같은 시간마다 소변검사를 하면 임신이 가장 잘 되는 날인 '배란일' 을 수치로 알려주는 테스트기다. 그렇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수치를 보며 오늘일까 내일일까 피 말리는 눈치게임이 시작된다.



배란테스트기가 정확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산부인과에서 배란 초음파를 보는 사람도 있다. 배란 초음파를 보면 일명 '숙제 날' 이라고 불려지는 날짜를 알려주시는데, 그 날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부부가 꼭 만나야 된다고 한다. 그만큼 중요한 날이지만 마치 하기 싫은 숙제라도 되는 듯, 그날만 되면 이상하게 컨디션이 안 좋고, 퇴근이 늦어지는 등 타이밍이 어긋나기 일쑤다. 최악의 경우, 배란일에 만나지 못해 앞서 노력했던 것들이 물거품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가임기가 지나고 나면 몸을 사려야 한다. 운동하러 가서도 격한 운동은 피해야 하고,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도 참아야 한다. 착상기에는 몸이 뜨거울 경우 수정란이 녹아버리기 때문에 이 추운 날 온수 매트도, 자동차 열시트도 틀 수 없다. 착상에 좋은 음식과 안 좋은 음식을 찾아보며 식단 관리도 하고, 일찍 자야 호르몬이 나온다기에 말똥말똥한 눈을 억지로 감으며 양을 세어보기도 한다.



그러다 생리가 터지면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이것저것 신경 쓰지 말고 평소처럼,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마음 편히 가지라지만. 마음 놓고 생활했던 일상들은 결국 죄책감이 되어 돌아왔다. '그래, 이번 달엔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어. 역시 추어탕을 좀 먹어야 했나?' 마치 내 책임처럼 느껴져, 다음 달엔 더 잘 참아보기로 다짐하는 게 일상이다. 어쩔 땐 차라리 생리 기간이 속 편하다.





남한테 말하기도 민망스러운, 그래서 나 혼자만 떠안고 있던 임신에 대한 고충을 이렇게 글로 쓰게 된 건 우리 할머니 때문이다. 주말에 할머니를 보고 왔는데 보자마자 대뜸 왜 아기 소식이 없냐고 호통을 치는 거다. 손 귀한 집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안겨드려야 할 거 아니냐, 집에만 있으면 심심한데 손주라도 데려오면 얼마나 즐겁고 좋겠냐는 할머니의 말에, 순간 '내가 임신을 해야 하는 이유' 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는 '왜 아기를 가지려는가' 에 대해 심도 있게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다. 때마다 친척 집에 방문하면 "임신은? 아기 소식은?" 하고 묻는 게 의례 인사가 되어, 어르신들의 기대에 응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을까? 우리보다 늦게 결혼한 주변 지인들이, 우리보다 먼저 임신 소식을 들려주니 거기서 오는 질투심과 조급함 때문이었을까? 결혼을 했으니 당연히 아기가 있어야 한다는 보편적 생각 때문이었을까? 생각의 꼬리를 물고 물어, 그 끝자락에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우리를 위한 임신인가, 타인을 위한 임신인가'






이 고민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임신을 한다면 우리의 아기는 그저 1년에 몇 번, 그것도 잠깐 만나는 집안 어르신들의 즐거움이 되어주기 위해서. 주변 지인들에게 우리 잘 살고 있어요 - 하는 보여주기 식 증거물 밖에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의 이유가 온전히 '우리' 가 되어야 행복한 부모, 행복한 아이가 되지 않을까? 그동안 아이가 와주지 않았던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아마도 내가, 그리고 우리가 부모가 될 준비를 제대로 하라고. 하나님께서 아기 주기를 미루셨나 보다.



건강한 엄마가, 부모가 되기 위해 준비해야 되는 건 운동이나 식단 관리가 아닌, 아기를 맞이할 마음공부였다는 걸 깨달아간다. 이제는 '임신이 잘 되는 법' 에서 시선을 돌려 '생각이 건강한 엄마' 에 집중하려 한다. 그렇게, 스스로 확신이 드는 순간 아기도 기쁘게 찾아와 주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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