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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May 06. 2021

7레이어케이크

상처에는 묵직한 연고를 발라줘야한다

돈도 없으면서 스타벅스에 와서 5700원짜리 7레이어 케이크를 사서 입안에 욱여넣었다.
2시간 전에 집에서 된장찌개에 밥을 비벼먹고 일전에 세븐일레븐에서 프리미엄에그샌드위치(2000원)를 사먹은 직후였다.
배가 부를만도 한데 마음이 허했다.
사치스러운 것을 혀안에 묵직하게 발라줘야 마음이 나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내 기준 버터가 듬뿍들어가고 가나슈가 듬뿍발린 느끼한 고강도 케이크를 골랐다.
처음 7레이어 케이크를 먹었을땐 두껍게 깔린 버터의 위용에 놀라 이런 걸 돈주고 사먹나 생각했었는데 이상하게도 가끔 아니 자주 종종 생각나는 케이크가 되어버렸다. 마음을 두껍게 눌러주는 누름돌 역할에는 이만한게 없다.


속이 상한다.
아침에 동생과 엄마는 크게 한바탕을 했다. 동생은 입시가 1년반 남은 고등학생인데 매일 문을 닫고 핸드폰만 보고 있고 그래서 엄마가 결국 폭발한거다. 어제는 동생의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 날 이었고 공식적으로 하루를 푹 쉴만도 한데 걔는 눈치가 보였는지 공부하는 척 책상에 앉아 놀고있었다. 사실 중간고사 기간에도 매일 성모마리아 자세로 핸드폰을 손에 껴안고 불을 켜고 창문을 열고 자는 그의 행동을 계속 보고있었던 나도 어제 그에게 폭발했다. 엄마가 너한테 기대를 많이 한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져라. 책임감을 좀 가져라.
그런데 오늘 아침 엄마도 폭발한거다. 뺨을 두대나 때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숨이 턱 막혀왔다. 동생의 책임감 없는 태도에 혼나도 싸다고 잠결에 속시원히 생각했었던 나였다. 그런데 그렇다고 뺨을 두대나... 갑자기 10년전의 막막했던 그 기분이 떠올랐다. 항상 엄마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 날카로운 기억에 정신이 아득해져왔다. 잘못이 뭔지는 커녕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막막함. 아무 생각없이 살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그 화살은 자기혐오와 불신에 가까웠다. 도대체 엄마는 나를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건지 너무 슬펐다. 숨이 턱턱 막혀왔었다.


거기에 대고 엄마는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너가 오고나서 애가 진짜 이상해졌어. 다 니가 밤에 늦게 자고 제대로 생활안하니까 그런거잖아."
아... 그런건가? 다 내가 제대로 안해서 그런건가? 자기 확신 없이 자꾸 술먹고 토하고 취하고 새벽까지 안자고 그러니깐 얘도 막나가는 건가. 나도 보고 배운게 그런것 밖에 없어서 그러는 건가. 엄마도 매일 집에서 핸드폰만 붙들고 주식하니깐 얘도 그렇게 살면 되는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으이그 바보야. 주식투자도 기초자본이 있어야 하는거라고. 지금 100만원이 없어서 생의 기로에서 고분군투 하는 사람이 주식투자를 해서 돈을 어떻게 벌겠냐. 너 정말 나 때문에 그러는거야? 내가 그럼 눈앞에서 사라져 주면 되는건가? 성가시게 하는 사람들이 눈앞에서 다들 사라지면 그 빈자리의 고요함이 더 무서운걸 알기에 나는 집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이런 내가 잘못인건가? 아니 그냥 이런게 장녀 컴플렉스인가?시발.


어제 교수님과 졸업논문관련 전화통화를 했었는데 교수님이 그랬다.
"김군은 참 잘됐군요. 나같은 경우도 그래요. 내가 천문학과를 진학한다고 했을때 우리 부모님께서는 그걸 아주 마음에 안들어 하셨다고. 그런데 그걸 이제 그래도 지지해주신다는 건 참 잘된일입니다. 원하는 분야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열심히 해보세요."
통화가 끝나고 생각했었다. 그래. 난 어쩌면 참 행운이야. 남들에 비해서 내 상황은 좋은 거지. 지금은 나에게 기회고 그냥 하기만 하면 되는거야. 내가 하는것에 달린거야. 그 동안 난 비교적 상황이 좋다는 걸 모르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이런 상황은 그냥 만들어진 행운이 아니다. 내가 싸워온 시간들이 아니었나 싶다. 엄마는 나에게 좋은 지지자 였던 건 아니었다. 항상 날카로운 창에 찔려 피를 흘렸던 쪽은 항상 내 쪽이 아니었나 싶고, 그 상처가 아물기 까지 걸린 시간들과 스스로 단단해지기까지의 이 모든 시간들은 그녀와 멀어지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스스로의 힘이 생기게 되면서 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성장했다. 나도 이제 다시 집을 떠나야 할 시기가 찾아온 것 같고, 그건 내 동생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은 1년 반동안을 잘 보낼 수 있도록 위로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것 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음이 슬프다. 상처의 기억은 깊이 남는다. 오래.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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