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세련된 뚱보개그!
'뚱보'는 코미디가 오랜 기간 사랑해온 소재다. 주로 '뚱뚱한 사람'의 외양과 행동을 대상화하는 이 유머코드는 그것을 놀리고 비하하는 것으로 유머를 소비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코미디가 마주한 '불편한 웃음' 그 최전선에 있다. 하지만 '뚱보' 유머코드는 간단하고, 보편적으로 그리고 원초적이고 자극적으로 쉽게 큰 웃음을 만들 수 있다는 그 속성때문에 그것이 문제시되는 오늘날까지도 근근이 이어지고 있다. '뚱보'개그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주로 대상화되어 놀림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웃음의 기본 틀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분명 올바르지 않다.
그런 '뚱보'코미디 역사에, 이 개그가 갖는 폭발적이고 원초적인 웃음의 결만 유지한 채, 대상화되던 '뚱보'를 주체적으로 소화해낸 인물과 코너가 있다. 오늘날 뚱뚱한 개그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남자, 유민상이다. 오랜 기간 대중 앞에 '뚱보' 개그맨으로 인식되어온, 그만큼 '뚱보'개그를 전면에 내세우며 대상화되는 것에 익숙했던 남자, 유민상의 시작은 그런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유민상은 한 때 신인들의 데뷔무대가 마련되었던(루키들을 위한 코너가 따로 존재했었다) <폭소클럽>에서 데뷔한다. 데뷔하면서 선보인 개그가 바로 <마른인간연구 x파일>. 데뷔 시절부터 통통한 몸매를 지니고(지금이랑 비교하면 상당히 마른 수준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인식하고 있었던 유민상이, '뚱보'를 소재로 만든 코너다. 코너의 설정은 대강 이렇다. 먼 미래, 세상은 뚱뚱한 사람들이 지배, 곧 보편이 된 사회가 왔고 과거 존재했다는 마른인간들의 식습관과 행동들의 연구자료를 알리는 내용이다. 데뷔 무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뛰어난 아이디어와 매회 톡톡 튀는 소재들은 지금 무대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만큼 세련되고, 흥미롭다.
이 코너가 가진 장점은 '뚱보'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음에도, 오랫동안 묵은 관계를 영리하게 전복시켰다는 점이다. 놀림거리와 비하의 대상이었던 '뚱보'는 이 코너를 통해 다수와 보편, 주체가 되고 '뚱보가 아닌' 사람들으 오히려 비웃으며 심지어는 비정상으로 치부하기까지 한다. 무대에 홀로 서서, 뚱뚱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른 인간'들을 비웃는 신인 유민상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태도는 이 개그의 장점을 몇 배는 더 끌어올려주었다.
또 하나, 이 개그가 '스탠딩 코미디'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뚱보'개그는 그 외양과 행동의 대상화가 필요했던 바, 주로 슬랩스틱(몸개그)의 형식으로 많이 보여져왔다. 부푼 배를 보여준다거나, 한꺼번에 엄청난 양의 음식을 밀어넣는다거나, 돼지 분장을 한다거나 하는 개그의 클리셰를 생각해볼 수 있다. <마른인간연구 x파일>의 무대는 연구복을 입은 유민상, 그리고 몇 개의 판넬만이 채운다. 이렇다 할 무대장치나 우스꽝스러운 의상과 소품없이, 오로지 연기자 유민상의 말로만 이루어지는 코미디다. 이 코너에서 관객들은 더 이상 비웃거나 (많이 먹는 모습에) 감탄하지 않고, 공감하고 돌아보며 공유한다. 수준 높은 코미디란 바로 이런 정도를 말한다.
<마른인간연구 x파일>의 유민상은 그동안 가장 저급하고 쉬운 소재의 유머 코드라고도 할 수 있는 '뚱보' 개그를 수준 높고 세련된 스탠딩 코미디로 승화시켰다. 개인적으로 <네가지>의 김준현과 더불어, 한국에서 시도됐던 많은 스탠딩 코미디들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가장 쉽게 웃길 수 있는 '뚱보' 코드를, '스탠딩'이라는 대단히 어려운 그릇에 담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과 아이디어가 유독 돋보이기 때문이다. <마른인간연구 x파일>은 자극성과 가학성으로 점철된 유튜브 시대의 코미디가 한 번쯤 돌아봐야 할 '명품' 코미디의 본보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