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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May 18. 2023

Dramaturgy

최혜지

“아무리 우리가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든다고 해도 지금 사는 이 세상만큼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들 순 없을 거다. 그래도 우리는 동료들과 포기하지 않기로 약속한다. 내가 사는 세상처럼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드는 축제 같은 그 날까지.”


시멘트로 쌓아 올린 최혜지 작가의 뉴욕 풍경 사이사이를 거닐다가 문득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정지오와 주준영의 내레이션이 생각났다. 이따금 지리멸렬한 인간관계가 마음을 처연하게 만들지만, 결국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드라마의 서사와 작가의 타임라인이 묘하게 닮은 까닭이리라. 본디 최혜지는 뉴욕에서 마주한, 국적·성별·피부색에서 기인한 도시의 구분 짓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삶이 교차하고 있음을,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에서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낯섦을 마땅히 받아들이기. 다시 말해, 물결 낭(浪)에 흩어질 만(漫),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상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1차원적인 관점에서, 변화한 작가의 태도가 온전히 형식으로 귀결된 것 같지는 않다. 이는 따뜻한 색감에 그렇지 못한 분위기에서 기인한다. 「나를 빌려 드립니다」를 집필한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Arlie Russell Hochschild)는 “우리는 사생활을 아웃소싱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감정·유대·죽음·추억 등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상품으로 취급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공동체의 몰락.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지나오며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통해 이뤄졌던 것들이 퇴색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그 결과 기름기를 쫙 뺀 담백한 어쩌면 나에게 유용한 인간관계를 지향하는 살코기 세대로의 전환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여기서 최혜지 작가 작품을 소환하면, 분명 캔버스 안에는 수많은 인종이 혼재하건만, 모두 각자의 길만 걸어가는 모양새다. 불현듯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뇌리를 스쳐 간다. 혼자만의 착각일까. 아니면 이 또한 오늘날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굳이 최혜지 작가에게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전시장을 둘러보기 전 슬쩍 들춰본 아티스트 북에서 읽은 “나는 의도적으로 시야를 넓히거나 좁혀가며 공존을 향한 답을 찾아갈 것이다. 이제 막 하나의 재료를 사용했을 뿐이다. 이 길에 나의 이야기를 남겨 앞으로의 시도들이 설득되고 기다려지길 바란다”라는 문장이 영향을 미쳤다. 그래, 현재진행 중이라고 하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자본주의에서 파생한 것들을 냉소적·비판적으로 바라본 벤야민에서 도시를 휘감은 멜랑콜리에 집중한 보들레르적 플라뇌르로 시선이 달라진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겠지. 시멘트를 매체로 사용한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시멘트에 수분 함량을 높이면 유동성이 좋아지는데, 물과 물감에 의해 적당히 묽어진 재료는 원하는 모양을 만드는 데 효과적이다.



종합하면, 최혜지 작업을 보고 있으니 아름다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에 있는 ‘드라마트루기(dramaturgy, 극작법)’가 떠오른다. ‘같이의 가치’라는 태도 아래 작품의 구성과 형식을 실험하고 있기 때문. 그의 말마따나 공존을 위한 답을 찾고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과정이 “위험한 미지의 타인과 연결되지 않으려는 신경증 덕분에 우리는 이 사회의 모든 사람이 얼마나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깨닫고 있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이제껏 언택트 해왔던 인간 소외의 현장에, 이제껏 서로의 삶을 알지 못했던 타인의 삶에 콘택트해야 한다”라는 사회학자 신진욱의 주장처럼 끈끈한 유대를 시각화한 결말로 이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변하지 않는 건 작가가 내세우는 ‘포용의 미학’ 아닐는지. 그렇기에 지금 최혜지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여러 방법론을 활용하는 중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20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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