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조
첫 제목은 생활의 발견
아침 7시, 전날 미리 맞춰둔 알람 소리가 몸을 틀고 손을 뻗어야 닿는 거리에서 들려온다. 어기적거리며 엄지손가락으로 ‘중단’을 누른다. 익숙한 경고음임에도 영 적응이 안 된다. 새로운 하루와의 첫 만남은 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머리와 가슴이 쉴 새 없이 돌아간 어젯밤 나에게 쓴 편지는 더는 재생되지 않는 플레이리스트가 됐다. 분명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었고, 무수히 많은 각오를 다졌다. 스마트폰 액정을 스크롤 하며 읽은 노랫말과 책 구절도 모두 내 이야기처럼 와닿았었다. 내일 일어나면 떨리는 감성으로 ‘꼭 하리라’ 주문을 외웠지만, 눈을 뜨니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래, 살아오면서 그때 그 다짐을 전부 현실화했다면 ‘마음고생’이라는 단어는 감성 사전에서 제외됐겠지. 부랴부랴 양쪽 눈을 비비고 나서야 잠이 깬다.
간단하게 곡기를 채우고, 비타민을 입에 털어 넣는다. 따뜻한 커피가 간곡하나, 일어나자마자 마시는 카페인은 호르몬의 불균형을 초래한다고 해서 꾹 참아본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으면 나갈 준비 완료. 엘리베이터 거울 앞에서 헤어스타일을 체크한 다음, 옷매무새가 단정한지 확인하려 한 바퀴 돌아본다. 오늘은 빠듯한 날이 예상돼 벌써 한숨이 나오지만, 이럴 때마다 코미디언 장도연의 강연을 되뇌면 힘이 난다. “다 XX이네!” 오전을 여는 리추얼의 마지막 단계가 끝났다. 8시쯤 대중교통은 그야말로 전쟁터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건 기본 중의 기본. 가끔은 욕을 동반한 싸움박질도 구경한다. 별로 엮이고 싶지 않아 이어폰으로 양쪽 귀를 막고,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이따금 곁눈질로 주변을 살펴보는 건 꽤 흥미롭다. 코딩이 유행이라서 그런지 출근길에도 매크로를 돌리는 것 같다. 8할 이상은 쇼츠를 보거나 온라인 쇼핑을 하고 있다. 액정 위 파란색 음봉의 향연도 클리셰다. ‘매일매일 정진하면, 인생도 주식도 양봉이 되겠지’라는 위안에서 출발한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금세 사무실 앞에 다다른다. 지문 인식으로 나의 존재를 확인받으니 어김없이 무거운 공기가 찾아온다.
동료와 수다를 떨고, 마우스와 키보드를 수만 번 어루만지는 궤도를 몇 바퀴나 돌았을까. 창가에 어스름한 저녁 빛이 스며든다. 사무실을 나설 땐 나의 존재를 크게 알리지 않는 것이 미덕. 빛보다 빠른 속도로 퇴근길 지하철에 올랐는데, 묘한 기시감에 흠칫 놀란다. 여전히 승객들은 쇼츠와 쇼핑에 집중하고 있다. 파란색 음봉도 그대로다. 아니다. 자세히 보니 저들은 배달 음식을 검색 중이다. 자연스레 나도 앱을 켜본다.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다. 바로 주문하면 도착까지 30분, 집 앞 마트에 들러 맥주를 사야겠다. 아니다. 회사에서 엄청난 양의 업무를 처리했으니, 나에게 선물을 주는 게 인지상정일 터. 불현듯 <슬기로운 의사생활> 속 송화의 “넌 요즘 널 위해 뭘 해주니?”란 질문이 귓가에 맴돈다. 아껴둔 위스키를 마셔야지. 조명은 색온도가 낮은 제품으로, BGM은 LP 음반으로, 커트러리는 북유럽 감성으로 세팅하는 것이 맛과 멋을 충족할 수 있다. 애석하게도 밤은 참 짧다. 집 안을 정리하고, 침대에 누워 언젠가 인스타그램 포토 덤프에 사용할 사진을 골라낸다. 예전 사진첩을 들추다 괜히 감상에 빠진다. ‘참 좋았는데’, ‘다시 돌아가도 그런 결정을 내릴까?’ 등 별의별 잡념이 지나간다. 살짝 눈물이 고여 새끼손가락으로 훔친다. 지금이 오기까지 마냥 순탄하지 않았다고, 견뎌줘서 고맙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또 다른 각오를 다지다 눈이 감긴다.
아무리 지난한 하루일지라도 먼 훗날엔 아기자기하게 느껴진다. 아홉수에 작성한 글 일부를 빌려오면, 언제부턴가 기대와는 다른 남루한 현실, 쇼윈도 갓생 뒤에 따라오는 허탈함,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초조함, 지근거리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서서히 체감하기 시작했다. 자칫, 여기에 매몰되면 권태와 절망과 허무의 굴레에서 허우적거릴 수 있기에 고독과 외로움이 관성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애를 쓴다. 사소해도 괜찮다. 너무 흔하디흔해 쉬이 시선을 주지 않았던 것들에 약간의 애정을 주는 일로도 충분하다. 데카르트의 이분법적 이론을 전복한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1908~1961)는 “우리는 지각의 세계에서 사는 것을 절대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비판적 사고에 의해서 지각을 초월한다. 그래서 진리에 대한 관념이 지각에 기초하고 있음을 잊는다”라고 주장했다. 미미한 존재일지라도 대상이 부재한 지각은 불가능하고, 지각된 대상은 의식에 의해 해석된다. 그러므로 메를로 퐁티의 세계관에선 대상과 의식을 철저하게 구분하지 말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인식하는 것이 필수다. 이러한 관념은 <이희조 개인전: The House Essay>에서도 발견된다. 반복된 일상이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믿는 이희조 작가의 전시는 평소 소홀히 여기곤 하는 집안 풍경을 통해 자기 삶과 소통하고, 다양한 감정과 생활 속 아름다움을 발굴하는 데 방점을 찍는다.
PBG 한남에서 진행 중인 <이희조 개인전: The House Essay>를 수놓은 작품들은 한마디로 일상다반사다. 초인종을 누르고 현관에 들어서면 부엌에서 빵을 굽고, 방 안에서 차를 마시고, 화장실에서 이를 닦는 모습이 펼쳐진다. 오전과 오후 사이에 벌어지는 여정을 담담하게 응축한 모양새다. 아무래도 이희조 작가의 작업 루틴이 모티브가 된 듯하다. “잠시 뒤척이다 스트레칭하고 대충 씻은 후 영양제를 챙겨 먹습니다. 핸드크림을 바르고 일할 모드로 나를 탈바꿈하죠. 책상 위엔 미술 재료, 커피, 메모지, 만년필, 립밤이 놓여 있는데요. 일상력(일상을 단단하게 가꾸는 힘)을 키워주는 도구이자 내 삶의 소재예요.” 지극히 상투적인 내용이지만,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정녕 안녕을 고할 수 있었을까. 자그마한 전시 공간을 거닐다 “당신이 지나친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그동안 특별함으로 승화될 수 있는 평범한 순간을 얼마나 떠나보냈을지 세어본다.
그렇다고 이희조 작가가 오로지 ‘잔잔함’에 몰두하는 건 아니다. 작업 노트엔 “할머니가 90세가 다 되셨는데, 항상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삶이냐고 질문하는 것을 좋아하세요.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노력해야 얻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살아가는 근원적 힘은 누군가의 말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어요”라고 쓰여있다. 이상하게 묵직한 울림을 준다. 작가의 설명은 몇 년 전 <제32회 도쿄 올림픽>에서 화제가 된 송민 위원의 서핑 해설과 일맥상통한다. “서핑계에는 ‘똑같은 파도는 절대 오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경기가 열리는 해변은 파도가 좋았던 적이 없어요. 선수들이 이런 상태를 불평하거나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해야 해요. 인생과 닮은 점이죠.” 행복도 찾으려는 자에게 온다고 했다. 이는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 자기애를 갖고 능동적이며 진취적인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닐는지. 이희조 작가 역시 “물이 떨어져서 바위를 뚫는다고 했던가요. 항구적 힘은 매일 하는 것에서 나옵니다”라고 덧붙인다.
종합하면, <이희조 개인전: The House Essay>는 단순한 일과 속에서 치열하게 나를 알아가고자 하는 우리네 삶을 묘사한다. 작가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을 오든(Auden)이라 부른다. 오든은 오래된 친구(old friend)를 뜻하는 고어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으나, 이 대목에서 위스턴 휴 오든(Wystan Hugh Auden, 1907~1973)의 시가 중첩된다. 그는 전쟁으로 절망에 빠진 20세기 중반 운율로 공허함을 이겨낸 시인이다. 특히, ‘일단 움직이라’(Leap before you look)는, ‘예사로운 삶에 집착하고, 불은 절대 꺼지지 않아야 하며, 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하라’(September 1, 1939)는 시구는 이희조 작가가 내세운 맥락과 연결된다. 연장선에서, 오든의 실험적인 문체(비속어 활용, 풍자적 성향 강조 등) 또한 원근감을 깨뜨리는 이희조 작가의 화풍과 성격이 비슷하다. 당시 위스턴 휴 오든은 안일한 도피주의 대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 태도를 선보여 호평받았다.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낭만을 노래했기 때문. 이희조 작가의 작업도 마찬가지다. 오든을 주춧돌 삼아 너와 내가 성장하길 바라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살아가는 근원적 힘이란 현재 마주하고 있는 누군가의 그림 속에 숨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024.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