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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빌어먹을 순정이라니

넷플릭스 중드 <난홍(难哄)> 쌍옌에게

by ENTJ피글렛

이런 빌어먹을 순정을 봤나.

이별을 고한 아니 공식적으로 대차게 자신을 찬 여자와 어떻게든 연결고리를 갖고 싶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녀가 하는 모바일 게임에 여자인 척 가입하질 않나(게다가 쌍옌의 게임 아이디는 그녀의 별명인 '상장'에 지다라는 의미인 패장(敗降)이다),

대학 1학년 땐 원이판이 폰 번호를 바꿔 그녀와 더 이상 통화를 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휴대폰이 고장 났다며 새 폰을 사는 가 하면(쌍옌 엄마가 알면 등짝 스매싱 감),

대학 4학년 땐 그녀가 이허일보에 인턴 기자로 입사하자 그녀의 기사를 스크랩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매달 이허까지 날아가 한 달치 신문을 사가지고 오는 남자라니(오죽하면 신문 파는 할머니가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라고 다 권했을까).

어디 이뿐인가.

자신의 대학 졸업식 참석 대신 먼발치에서나마 그녀의 졸업 축하를 위해 또 그렇게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그녀가 신문사를 퇴사하는 날에는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그녀의 최애 케이크인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종업원을 통해 건네주기도 한다.

그랬다. 그들이 떨어져 있는 6년간도 쌍옌은 고교시절 원이판에게 했던 ”언제나 네 곁에 있어줄게"라는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

원이판은 몰랐으나 쌍옌은 그렇게 공기처럼 그녀 곁을 맴돌았다.

이토록 절절한 빌어먹을 사랑이라니. 이다지도 애절한 순정이라니.




도대체 내가 왜 이토록 맹렬히 쌍옌앓이를 하고 있는 걸까.

뭐 답은 자명하지 않겠는가.

세상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어본 것 같긴 하나 실제로 만나 본 이는 없다는 유니콘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쌍옌은.

누구나 '내 남자'이길 간절히 바라지만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너무 비현실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쌍옌은


우리는 우리 은하 중심에서 2만7000광년 떨어진 태양계 한 구석에서 이 드라마 마지막 회에 나오는 <오렌지만이 과일이 아니다>라는 책의 한 구절처럼 이 생의 언젠가 간절히 죽음만큼 격렬한 사랑을 받길 원한다.

그리고 원이판의 독백처럼 "그게 바로 너야"라고 말해줄, 말하고 싶은 누군가가 절실하다.

폭풍 속을 뚫고

마법의 문을 넘어

중력을 거슬러 날아오르는 날개처럼

나를 생의 끝까지 격렬하게 사랑해 줄 단 한 사람,

나의 쌍옌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길을 잃고 헤매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여행자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비밀스런 사랑의 주문처럼

시끄럽던 어느 오후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지는 그 마법 같은 순간처럼

비 온 뒤 싱그런 흙내음이 묻은 가벼운 바람처럼

나를 기꺼이 따뜻하게 안아 줄 단 한 사람, 나만의 쌍옌을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나 살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죽음만큼 강렬한 사랑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서글프게도

내게 영원을 맹세했던 첫사랑 그도, 나 아니면 죽겠다던 대학시절 남자 친구도, 열렬한 구애를 보냈던 n번째 그 남자도 모두 다 흔하디 흔한 연애사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나면 또 그렇게 통속 드라마 한 장면처럼 끝을 보고 만다는 것을.

그 달콤했던 맹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공기 중에 가벼이 휘발된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영원한 사랑이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세상에 그런 사랑 따위는 없다는 걸 삶은 무시로 일깨워 준다.




그러나 원이판에겐 사랑의 끝이라 믿었던 대입 입시 결과 발표가 있던 비 오던 날 밤,

쌍옌은 그 눈물겨운 첫사랑의 '챕터 2' 서막을 연다. 삶의 중력을 단호히 거슬러.

세상에 마지막 남은 공주 원이판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세상 마지막 흑기사를 자처했던 이 남자는 이후 6년 아니 8년간 눈물겨운 사투를 벌인다.

자신의 세상이 산산조각 난 그 한복판에서 여동생 상쯔가 알려준 '공주님 구출하기' 작전을 착실히 수행한다.

수많은 역경을 헤치고

온갖 무예를 익히고

눈 덮인 산과 사막을 건너

괴물이 들끓는 숲을 지나

마침내,

드디어 원이판을 구출 아니 구원한다.


쌍옌 역의 백경정은 분명 그의 생에 언제쯤 가슴 절절한 사랑을 해봤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복잡다단한 눈빛을, 그런 애절한 포옹을, 그런 달콤하면서도 격렬한 키스를 할 수 없을 테니.

그리하여 그는 <난홍>에서 멜로 눈깔 장착한 멜로드라마 남주의 연기 차력쇼가 무엇인지 완벽하게 보여줬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쌍옌의 그 따스한 포옹을, 강렬한 키스를, 그 포근한 쓰담쓰담을.

서로 바빠 며칠 못 본 어느 새벽, 집에 돌아온 쌍옌이 취재 차 막 나가려던 원이판을 보고 그녀의 한쪽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끌어안던 그 달콤한 포옹을, 홍콩에서 재회한 원이판을 끌어안던 쌍옌의 애절한 두 팔은 스웨이드 재킷에 가려져 있지만 어쩐지 그의 팔뚝 근육과 신경세포의 떨림까지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녀의 침대 끝 벤치에서 잠든 쌍옌이 아침에 일어나 원이판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으며 그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던 그 투샷도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쌍옌의 포옹이 이토록 절절한 이유는 단연컨대 그가 두 팔만으로 상대를 끌어안는 것이 아닌

얼굴 근육과 목 근육까지 온 영혼을 다해 끌어안기 때문이리라.

살면서 한 번쯤은 안겨보고 싶은 바로 그런 뜨거운 포옹이다.


그리하여 한 인간이 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인류의 오랜 난제에 구우녕 감독은 원작과 달리 너무 편파적으로 쌍옌의 손을 들어준 감이 없진 않지만(물론 구 감독을 십분 이해는 한다. 멜로드라마의 성패는 남주의 멋짐이 얼마나 여심을 흔드느냐에 달려 있으니)

어찌 됐든 이들은 멜로드라마의 뻔한 결말인 남주의 멋진 프러포즈와 결혼을 약속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물론 알고 있다.

결혼 이후 이들의 삶이 계속 동화 같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걸.

그러나 이들의 이후 삶을 추측하는 것만큼 허망하고 헛된 짓이 또 어딨겠는가.

어차피 동화란 딱 거기까지면 된다.

쌍옌이 대관람차에서 원이판에게 입 맞추면서 했던 그 명대사 “그 이야기(대관람차가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키스한 커플은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는 너를 믿게 하기 위해서야"처럼,

드라마 '나인' 이진욱의 대사처럼 믿고 싶은 판타지는 믿고 사랑하고 싶은 이는 사랑하면 된다.

이토록 빌어먹을 순정을. 쌍옌이란 판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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