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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황망한 결심

소설, 그까이꺼 대충

by ENTJ피글렛

#빌런의 역습

아주 오래전 소설이라는 걸 써볼까 꽤나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첫 줄도 써보지 못한 채 무산됐다. 소설이라는 게 더욱이 첫 소설을 쓰는 작가의 경우 자신의 경험을 밑천 삼는 경우가 대부분일진대 당시 내 소설의 원동력이 될 빌런의 모델이 소설 출간 후 내게 그 캐릭터가 자신이 아니냐며 따져 물을까 지레 겁먹었기 때문이다(설마 이걸 내가 농담이라고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당신이 소설을 쓴다고 가정해 보길. 아마 내 이 엄청난 공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다).


내 이 야무진 기우에 대해 훗날 남편은 세상 그 어떤 누구도 소설 속 악당이 자신을 모델로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말해줬다. 혹여 주인공(아마도 그건 나일터)의 조력자이거나 은인이 자신이라고 착각한다면 모를까라는 친절한 부연설명까지 붙여서.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단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합리적이고 선한 의도를 가진 인간이라고 자부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내게 들려줬다.

게다가 그 빌런이 내 소설을 읽을 만큼 내 소설이 유명해질 것이라고 착각한 내 김칫국 한 사발은 또 어떠한가.

어쨌든 당시 내가 소설을 써야 하는 이유였던 그 빌런들이 자못 겁나 내 소설 프로젝트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순조롭게 무산됐다.


이후 조금 더 시간이 지나 그 빌런들과의 악연을 정리하고 다시 소설 집필의 희망을 살포시 펼쳐 보려던 찰나, 난 더 이상 쓸 이야기가 없어져 버렸다는 황망한 현실과 마주했다.

소설이라는 게 모름지기 인간과 삶에 대한 애증에서 출발하거늘 나는 어느 순간 세상만사는 물론 주변인들에 대해 눈곱만 한 애정은 물론 증오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눈치챘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박해영 작가의 말처럼 눈뜨고 있는 모든 순간이 노동이었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어느 순간, 그 잔인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 인간들에게 이해라는 헌사까지 갖다 바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소설가 김연수는 서른 이후 삶은 없다며 유서를 품고 다녔다 하고 68세대들은 서른 넘은 인간은 믿지 말라고 했던가. 딱 그 짝이었다. 사느라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 보니 먹고 사느라 바쁜 내 마음의 안녕을 위해, 그도 아니면 나도 내가 입에 거품 물고 욕하던 인간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깨달은 탓인지 도저히 이해 불가한 세상만사가, 인간 군상이 절로 이해됐다. 아니 꾸역꾸역 이해해야만 했다. 굳이 변명을 보태자면 나도 살아야 했으니까.


어쩌겠는가. 글쓰기는 그쯤에서 작파했다. 더 이상 세상사가 눈에 거슬리지 않고 딴지 걸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 우려먹을 글감이란 존재하지 않으니. 오호통재라.




# 다시 글을 쓰겠다는 결심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그놈의 글이라는 걸 써보겠다고 어젯밤 창포물에 머리 감고 목욕재계하고 오색 치마 뻗쳐 입고 모니터 앞에 앉았다. 얼마 전 백수가 된 탓 시간이 남아돌기도 하거니와 그전날 들여다본 유튜브 속 타로 마스터의 점괘가 내가 유튜브 같은 걸 해봐도 좋을 것 같다고 해서다. 고백건대 그 말에 잠깐 흔들려 혹시라도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철석같이 믿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5년 전 만들어 놓은 브런치 계정에 접속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계정은 살아있었다. 그리하여 1초에 한 번씩 깜빡거리는 모니터 속 커서가 어서 빨리 자판기 두드리길 재촉하는 그 피 말리는 시간 앞에 다시 선 것이다.


신문사 수습 시절 내 사수는 늘 “야마를 칼같이 세워라”라고 강조했다. 야마(やま)는 일본어로 '산'이란 뜻인데 기자들 사이에선 기사 주제를 의미한다. 기사 작성 시 기사 주제를 칼같이 세워 샛길로 빠지지 말라는 말이다. 이는 10년이 넘는 기자생활 내내 내가 금과옥조처럼 받든 명제였다. 그러나 지금 나는 칼같이 세울 야마랄 게 딱히 없다.


소설가 김영하는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 소설을 읽으면 현실과 다른 상상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지금 내 삶이 아주 특별하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글쎄… 활자 중독자로서 꽤 오랜 시간을 살아온 나에게 소설은 그저 내 비루한 하루의 작은 위안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라도 건진 날은 책 표지만 오래 들여다보다 며칠을 묵혀 읽기도 했다. 그 하루의 위안을 조금이라도 유예해 보고파서 말이다.

내 삶이 초라하고, 어떤 날은 시궁창 속에 처박힌 것 같을 때 나처럼 시궁창 속을 헤매는 소설 속 주인공이, 어떤 날은 나보다 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 또 어떤 날은 남들 눈엔 사회 부적응자로 보이는 주인공의 친구가 나에게 따스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니가 그렇게 아주 이상한 것만은 아니라고. 맞다. 내가 세상과 한 인간에 대한 느끼는 끔찍한 감정이 나 혼자만의 별스러운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졌다. 심지어 어떤 때는 니가 옳아, 그놈이 나쁜 놈이야라고 내 편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 속에서 나는 거친 숨을 잠시 재워두고 편안할 수 있었다. 완벽한 위로였다.




#당신과 나의 이야기

그리하여 이제 부디 나의 글이, 나의 목소리가 당신에게 가 닿기를.

너무 해사해 눈물 날 것 같은 초여름 저녁, 퇴근길을 재촉하며 당신만 그 빌어먹을 그 누군가를 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도 그렇다. 당신만 기막히고 코 막히는 인생 어깃장에 입술을 깨무는 것은 아니다. 나도 그렇다. 당신만 가혹한 현실 앞에 손쓸 방도 없이 속수무책인 것은 아니다. 나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시인 황인숙은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했으나 나는 당신의 피나 침이 내게 좀 튀어도 뭐 괜찮다. 그리하여 내가 입고 있던 하얀 셔츠가 당신이 토한 피로 조금 붉게 물든다 한들 괜찮다. 내가 토한 피로 얼룩진 것보단 훨씬 덜 애잔할 터이니.

또 시인은 ‘강가에선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했던가. 그러나 우린 우연히 강가에서 만나면 그땐 가벼운 눈인사 정도는 나눠도 좋겠다. 뜨거운 자발적 연대야 말로 나와 당신이 이 창백한 푸른 점 위에서 그나마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일지니.

자 그러니 이제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과 나의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황인숙 詩 ‘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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