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에서 진급 누락자로 살아가기
2017년 12월, 3년 차 연구원 시절의 일이다.
팀 내 1년 선배 두 명이 동시에 대리 진급 누락을 했다. 두 명 진급 케이스에 두 명이 누락을 해버리다니..
원래대로였다면 그다음 해는 나 혼자 진급 케이스로 무난히(?) 절차를 밟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자연스럽게 다음 누락 대상은 내가 되어버렸다.
(우리 회사는 4년 차에 대리 진급 케이스로 비극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5년 차에 '연구원 갑', 대리가 된다.)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직무는 설계 파트. 사실 입사하고 3년 정도는 업무를 배우러 회사에 다닌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거의 혼자서 할 수 있는 업무가 없다. 그렇다 보니 성과라는 걸 만들어내기 어려운 위치일 수밖에 없고, 대리 진급은 그야말로 연차가 쌓이고 차례가 되면 '자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좀 해볼래?'라는 회사가 내려주는 어떤 공식적인 지침 정도로 여겨진다.
지금은 문화가 좀 바뀌고 있으나 얼마 안 된 과거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연공서열'이라는 게 존재하여 웬만해서는 선배를 제치고 먼저 진급하는 그런 일은 없었던 시절이다. 눈앞에 다가올 비극을 막을 방법을 알지 못했고 이듬해 12월, 동기들 대부분이 진급 축하 회식을 예약하던 그날에 인사팀으로부터 연차 진행이 되지 않았으니 조금 더 노력하라는 메일을 받고 그렇게 난 '진급 누락자'가 되었다. 그때 나에게 씌워진 '진급 누락자'라는 징표는 5년이 지난 2023년 현재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조금 더 회사에 헌신하고 열심히 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사실 나의 진급 누락은 어떤 이에게는 관심의 영역 밖일 확률이 크다.
8번째 입사기념일 날, 오랫동안 같이 일했던 선배와 나눈 카톡 내용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타인에게 무관심하다.
진급 누락 후 계속되는 찝찝함의 연속.
15년도에 입사해 정상 적으로라면 19년도에는 '연구원 갑'으로서 업무를 수행해야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고, 이따금 카운터파트 사람들로부터 '대리님'이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내가 진급 누락자라는 사실이 가슴 한편을 찝찝하게 만들곤 했다. 이 찝찝함은 대리 진급을 한 후에도 계속되어 누군가에게 나의 연차를 설명할 때 '입사 연차로는 N년차 인데요, 대리 연차로는 N-5년차에요'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계속되고 있다. (정상적인 대리 연차는 N-4년차 이다.)
사실 연차 진행이 정상적으로 되든 안되든 겉으로 드러나는 직급에는 변화가 없다. 사원급이던, 대리급이던 모두 공식적인 직급은 연구원이기 때문. 대리 진급을 정상적으로 한 동기들과 월급도 비교해 봤다. 피부에 와닿을 만큼의 차이는 없었고, 동기들 대비 내가 갖고 있는 장기인 특허 출원으로 그들과의 월급 차이는 충분히 상쇄시킬 수 있었다. (업무상 특허 출원 시 회사에서 판단하는 특허 등급에 따른 보상금이 지급된다.)
대리 진급 누락의 문제는 다른데 있다. 바로 책임연구원으로의 진급이 한 해 미뤄지는 것. 이게 가장 큰 문제점이고 그렇기 때문에 난 2022년 12월, 동기들이 책임연구원으로 진급을 할 때 축하메시지를 보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입사 연차로 7년차, 대리 2년차 시점인 2021년, 나는 팀을 옮겼다.
설계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은 이 회사에 인턴쉽을 지원할 때부터 알고 있었으나, 혼자서 업무를 수행하게 될 때쯤이 되어도 여전히 일을 하며 얻는 성취감이 별로 없었다. 어떻게든 일은 해야 하기에 관련 자격증 취득까지 해보았지만 마음속에서 팀을 옮기고 싶다는 불이 지펴진 이상 행동에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 회사에서 팀을 옮긴다는 건(특히나 연구소에서) 회사 생활을 아예 새로 시작하겠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만큼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 경험적인 측면이 중요하고 팀을 옮겨 다른 직무로의 전환은 상당한 노력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물론 팀을 옮기는 케이스도 매우 드물기도 하다. 하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회사에서의 생활이 즐겁지 않고 지루하니 내 인생 자체가 지루하게 느껴져 안 되겠다 싶어 결단을 내렸고, 그렇게 난 지금의 팀으로 소속을 옮겼다.
다행히 옮겨온 조직에서의 업무는 내가 꿈꾸던 연구소의 모습과 상당 부분 일치하여 하루하루가 활기찬 느낌이 든다. 전보다 배 이상으로 훨씬 바빠졌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 부분은 나에게 있어 문제가 아니다.
2022년 12월, 후배가 나보다 먼저 책임연구원이 되었다.
옮겨온 팀에는 입사는 내가 빠르지만 나의 대리 진급 누락으로 인해 진급 동기인 1년 후배가 있다. 후배이긴 하지만 나이가 같아 편하게 지내는 사이이다.
그 친구는 입사를 이 조직으로 했기에 나보다 업무 역량이 훨씬 뛰어나다. 명목상으로는 내가 선배이나 적어도 이 조직 안에서 만큼은 실질적으로 그가 나의 선배임은 자명하다.
대리 진급을 실패했던 그 시절과 달리 요즘은 '조기 진급'이라는 제도가 활성화가 되고 있는 추세이다. 따라서 대리 3년차인 나도 그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2022년 한 해 정말 열심히 일했다. 적성에도 맞는 것 같고 무엇보다도 일이 재미있어 정말 열심히 일했다. 인사 평가 기간에 면담을 할 때도 관리자들은 나에게 팀을 옮겨왔는데도 불구하고 업무 역량이 뛰어나고, 특히 하루하루 발전하는 모습이 돋보인다며 칭찬을 해줄 정도로 열심히 했다. (입에 발린 말들이었을까?)
인사 평가가 한참이던 11월, 실장님이 나를 조용히 불러 나와 내 진급 동기인 1년 후배와의 고과를 비교해 주며 최대한 동일한 고과로 맞춰서 조기 진급 대상으로 올릴 예정이나 1순위는 내가 아닌 내 후배가 되어야 할 것 같다고 귀띔을 해주셨다. 그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난 여태 받아보지 못했던 고과 최고점을 대리 3년차에 처음 받아보았다. 고과 성적표를 받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 진급은 어렵겠구나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12월 직원 승진 발표가 있던 날 오전, 팀장님이 나를 조용히 불러 커피를 사주시며 1시간에 걸친 위로와 덕담의 말씀을 전해주셨다. 한 달에 걸쳐 이런저런 행복 회도로 돌려보고 혹시나 조기 진급의 대상이 내가 아닌 후배가 되어도 침착하게 진심으로 축하해 주자고 마음의 다짐도 했건만, 팀장님의 확인사살(?)에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유는 조기 진급을 못해서도, 후배가 먼저 진급을 해서도 아니다. 여전히 회사에 의존하는 삶을 살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독립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여전히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고, 나는 회사의 노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노예 생활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는 게 온몸에 있는 세포 구석구석까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상급 노예로 선택받지 못해 아쉬운 이 현실이 부끄러웠다.
오후 2시, 인사 발표 시간이 다가와 결국 후배가 먼저 조기 진급을 해 책임연구원이 되었고 순식간에 그 친구와 나는 연차가 2년이 뒤바뀌어 버렸다.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었지만 왠지 모를 씁쓸함은 어쩔 수 없는 내 몫이었다.
그렇게 난 5년차 진급 누락자로 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