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나를 이토록 목마르게 했나.
우리 집 두 녀석들은 언제쯤 산타 할아버지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까?
나는 그 사실을 너무 빨리, 다섯 살 크리스마스에 알아버리고야 말았다. 벌써 30년이 다 돼가는 그날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유치원 크리스마스 행사가 있던 날 산타 할아버지가 우리 유치원에 오셨다. 한 짐 가득 선물 보따리를 들고서. 기억나지 않는 간단한 행사를 마치고 한 명씩 호명해서 선물을 받는 시간이 있었는데, 내가 받은 선물이 친구들 중에 제일 컸다. 그 자리에서 선물을 뜯어보니 집에 있는 장난감 소방차와 같은 게 들어있었다. 의기양양해진 나는 친구들에게 내 선물이 제일 크다며, 집에 똑같은 게 있으니 이렇게 큰 소방차가 두 대라며 신나게 떠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에서 소방차 한대를 사촌형한테 줄 거라며 엄마에게 신나서 말했던 기억도 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 보니 웬걸, 있어야 할 장난감 소방차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 그제야 어색하게 수염을 잡고 있던 산타 할아버지는 가짜였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제일 큰 거라고 떠들었던 소방차가 사실은 집에 있던 원래 내 소방차였다는 것도, 그걸 엄마가 유치원에 보내서 다시 내가 받은 것뿐이라는 그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부모가 되어서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은 어떤 생각으로 날 키우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떠오를 때가 많다. 지금 우리 집 두 녀석은 장난감이 너무도 헤퍼서 아예 방 하나를 장난감 모시는 방으로 쓸 정도다. 나 역시 어릴 때 비교적 친구들 대비 장난감이 많았었던 것 같다. 마트에 갈 때마다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다가 혼나던 기억도 많다. 근데 이건 어느 정도 성장한 뒤 얘기다. 다섯 살이면, 우리 집 막내 녀석만 봐도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인데 꼭 그래야만 했을까? 사는 게 어려워서 그랬을까? 집에 장난감이 너무 많아서? 미리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 집에 있는 장난감을 유치원 행사에 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엄마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돈에 대한 갈증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15평짜리 임대아파트
초등학생이 될 무렵 우리나라는 IMF 경제 위기의 시대를 지나고 있었다. 우리 집 역시 경제위기를 직격탄으로 맞고 아빠가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았다. 그 이후로 한동안 집이 어려웠고 엄마는 항상 일을 했으며 내가 초등학생이 되어 6학년 가을까지 우리 집은 15평짜리 임대 아파트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좁은 곳에서 어떻게 아들 둘을 키워냈는지 우리 부모님도 참 대단들 하신 것 같다. 그 좁디좁은 아파트에서 행복했던 기억도 많지만 '나중에 커서 돈 많이 벌어야지'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게 된 일화들이 많다.
초등학교 2~3학년쯤 일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과학상자 만들기 대회가 열린다는 공지가 있었는데 그게 너무 재밌어 보여 별생각 없이 참가 신청서를 쓰고 집에 왔다. 엄마한테 이런 행사가 있어서 과학상자를 사 가야 한다는 얘기를 별 대수롭지 않게 했더니 돌아온 건 돈 들어가는 일을 왜 상의도 없이 신청했냐는 한숨 섞인 대답. 2~3만 원쯤 하는 과학상자가 그 당시 우리 집 형편에 부담이었나 보다. 돈이 들어가는 일은 미리 상의를 하고 결정해야 하지 않냐며, 이런 건 우리 집 가계부를 생각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그렇게 15평짜리 임대아파트 부엌에서 난 엄마로부터 한참 동안 훈계를 받았다.
초등학교 4학년,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려면 막연히 공부를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파트 상가에 있는 작은 속셈학원에 다니고 싶어 어느 날 엄마한테 학원을 보내달라고 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교생이 200명 남짓인 작은 학교였지만 난 항상 반에서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꽤 잘했고, 그 당시 학원비도 한 달에 10만 원이 채 되지 않는 금액이었기에 그 정도는 충분이 얘기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학원을 보내달라는 내 말에 엄마의 대답은 '이번달은 어려우니 9월 1일 되면 보내줄게.' 날짜도 선명히 기억한다. 서글펐다. 장난감도 아니고, 옷이나 비싼 신발도 아닌 '학원'이니까 형편이 어려워도 당연히 보내주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 우리 집에서는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돈이란 게 뭐길래 이토록 내 인생을 어렵게 하는지 원망까지 들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자식이 공부해 보겠다고 학원 보내달라는데 그것 조차 쉽게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니 우리 부모님도 힘들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서글픈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우리 집은 그리 풍요로운 집은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 첫 중간고사, 그때 난 핸드폰이 너무 갖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었다. 다니던 학원 원장 선생님과도 첫 중간고사에서 국영수사과 전부 100점을 맞으면 핸드폰을 선물로 달라고 딜을 할 정도였고, 원장 선생님은 OK를 하셨다. 그 사실은 물론 우리 부모님도 알고 있었다.
간절하게 염원하면 뭐든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첫 중간고사에 난 '국영수사과 올 100'을 달성했다. 원장 선생님은 본인이 경솔했다며 핸드폰은 너무 비싸니 다른 건 안 되겠냐고 역으로 딜을 걸어오셨고, 지금 내 성격이었다면 약속한 대로 해달라고 했겠지만 그때의 난 그러지 못했다. 결국 원했던 핸드폰을 가지지 못해서 시무룩하게 며칠을 지내니 아빠가 보다 못했는지 평소 갖고 싶어 했던 핸드폰을 과감히 (할부로) 사주셨다. 핸드폰을 사는 그 순간에 나는 기뻤지만 아빠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내 기억에 며칠을 핸드폰 값에 걱정하시는 아빠의 모습을 보았고, 그 모습을 보는 나로 하여금 조금만 더 참을걸 하는 후회를 하게 만들어 주었다.
2학년 여름쯤 교복 셔츠를 잘못 빨아서 못 입게 된 적이 있었다. 아침에 엄마는 출근 전에 집 앞 편의점에서 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아 나에게 쥐어주며 일단 이거로 셔츠를 사라고 하셨는데, 단돈 몇 만 원이 없어 현금서비스를 받아 주셨던 그 돈이 참 무겁게 느껴졌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난 자연스레 용돈이 필요해도 더 달라고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한 달 4만 원이 용돈이었으니까 일주일에 만원, 하루에 쓸 수 있는 돈은 몇 천 원이 남짓이었고 당시 육개장 컵라면이 600원 정도였으니 학교에서 매점은 거의 못 가고 하교 후에 학원 가기 전에 컵라면이 거의 내 저녁식사였다. 그럼에도 용돈 더 필요하지 않냐는 엄마의 물음에 괜찮다는 답을 반사적으로 하던 나였다.
돈은 어려운 것이다.
그렇게 내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 기억에 있어 '돈'이라는 것은 항상 부족하고 많이 갖기 어려운 것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어렵다. 땀 흘려 번 돈이 제일 가치 있고,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하며,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서 착실하게 저축하며 사는 게 옳은 방향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그 가르침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보니 이대로만 살아서는 '자유'라는 것이 내 인생에는 영원히 허락되지 않을 것만 같다. 결국에 나는, 적어도 현재까지는 내 시간을 누군가에게 팔아 '적당한' 소득과 맞바꿔 '적당히'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톱니바퀴의 한 이빨 정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비록 금수저로 태어나진 않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금수저로 키워줄 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질적으로, 경제적으로 물려줄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는 게 자본주의 사회를 완벽히 살아내고 승자가 되는 방법인지를 알려줄 방법을 알아야 한다. 앞으로 내가 쓰는 글에는 그 방법을 알아내는 과정을 담아낼 것이다.
비록 나도 아직 방법을 찾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그 길을 찾길 바라며, 동시에 최소한 우리 아이들은 나와 같은 시행착오의 시간을 단축시키길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