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도 이제 어른이 될게" - 육아휴직 여행기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하다가 숙소 근처에서 우연히 발견한 장소가 있었다. 뙤르 호수 (Toolonlahti)를 중심으로 산책로가 만들어진 헤스페리아 호수 공원 (Hesperian puisto)이 그곳이다. 핀란드의 자연이 만든 호수 산책로 길가에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놀이터가 있었다. 그 옆 벤치를 그 후로 틈만 나면 맥주 한 캔 들고 혼자 찾아가곤 했다.
오후 10시가 넘어서야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헬싱키의 백야는 시간대 별로 다른 호수의 정취를 만들어냈다. 그 호수에 발을 담그고 앉아서 가져온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이곳에 오기까지 있었던 지난 일들을 떠올려 봤다.
용기 내어 육아휴직을 결심하기 직전에,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복지로 무료 지원하는 심리상담 치료를 받아 보았다. 절반은 호기심이었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감정조절이 어려워짐을 느끼면서 혼자 해결하기엔 무언가 벅찬 기분이 들었던 것도 이유다. 그렇게 총 10회에 걸친 심리상담에 참석하면서 나는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암 선고와 죽음 그리고 그 후 본격적으로 겪게 된 부모로서의 무게까지. 평소에도 아내와 대화가 많은 편이지만 육아와 회사 일로 미처 할 수 없었던 속 이야기들, 막상 분위기가 잡히지 않고는 꺼내기 힘든 이야기들까지 말로 내뱉고 나니 한결 속이 시원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상담에서 담당 심리치료사가 추천해준 '글쓰기'를 통해서 나 자신도 미처 몰랐던 내 마음속의 오래된 상처를 꺼내어 보게 되었다.
"길을 잃어보지 않고는 나를 발견할 수 없다."
- 《굿바이 블랙독》 중에서 -
그렇게 나 스스로를 용서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그리고 그런 아빠를 응원해주는 우리 가족들과 함께 나는 다시 원래의 내 모습으로 회복되어 가고 있다.
췌장과 담낭을 제거하는 10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하고 난 이후로도 우리 가족은 석 달을 넘게 병원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100여 일 만의 첫 퇴원을 하고 또다시 한 달 만에 다시 재입원하게 되긴 했지만, 아버지가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는 끝까지 놓지 않았다.
두 차례의 대수술을 견뎌내느라 10년은 늙어버리신 아버지의 앙상한 팔에 적어도 하루에도 10번은 수시로 와서 주삿바늘을 꽂아대던 간호사들을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3개월 남았다는 담당 주치의의 통보를 듣고 난 이후였지만, 첫번째 퇴원은 이제 '죽음' 보다 '삶'에 가까워졌다는 기분마저 들게 했던 때이기도 했다.
그때는 기적이 우리에게 일어날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수술 부위에 계속 물이 차서 복부에 호스를 연결한 채로 생활하셔야 했다. 그 물이 말라야만 퇴원해서 집으로 갈 수 있다고 의사는 처방을 했고, 그렇게 병원에서의 긴 '희망고문'이 시작되었다.
수술 이후 다리에도 힘이 없어지고 음식도 돌을 씹듯 입맛이 영 없다고 하셨다. 그래도 힘내서 집에 가자고 다독이면서 가벼운 운동도 해보시고 억지로 식사도 곧 잘하셨다. 하지만 그렇게 관리를 잘해서 퇴원이 가까워졌다가도, 내일은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환자 본인은 물론, 매일 교대로 간병을 하는 어머니와 나도 갈수록 지쳐만 갔다.
정말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잘 회복되시던 중에 갑작스러운 재수술로 다시 그 지옥 같은 수술실로 아버지를 들여보내야 했던 그 날.
다인실 병동 아버지 침실 옆에서 쪽잠을 자고 아침마다 어머니와 교대한 후 출근을 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출근하는 아들에게 잘 갔다 오라며 인사하신 아버지셨다. 그날 새벽에도 언제나처럼 딱딱한 병실 침대 때문에 등이 배긴다고 하시며 잠든 아들을 깨워 병동 한 바퀴를 도실 만큼 이상 없이 잘 회복 중이던 때였다.
그런데 회사에서 오전 팀 회의가 끝나고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울먹이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웠고, 간호사가 전화기를 넘겨받았다. 수술했던 내장이 다시 터져서 출혈이 심해 지금 당장 급하게 재수술에 들어가야 하니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다는 전화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 전화 통화를 끝내고 나는 정신없이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 눈물이 차올라서 운전하기 위험했지만 나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가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려야만 했다.
언제나 나를 지켜줄 것만 같았던 부모님 두 분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두 분이 나를 보는 눈빛은 예전과는 달랐다. 그때 그 눈빛이 어린 시절 내가 그들을 바라보던 눈빛이었을까.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수술실로 뛰어갔다. 그때 마주친, 중환자실에서 수술실로 침대에 눕혀진 채로 다급하게 끌려가듯 들어가시는 아버지와 스치듯 마주치게 되었다.
"무슨 수술을 왜 또 해..."
"괜찮을 거예요 아버지. 맘 편히 하시고 한 숨 푹 주무세요. 우리 여기서 기다릴게요."
그때 나를 보던 아버지의 그 눈빛. 그 순간은 할 수만 있다면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다.
It's not your fault,
It's not your fault,
It's not your fault...
- 《굿윌헌팅》 중에서 -
지난겨울 우리는 아버지의 삼년상을 모셨다.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 믿고 오로지 회복을 위해서만 달렸다. 회복이라는 목표에 집중을 넘어선 집착을 한 만큼 그에 대한 상처 또한 깊었던 3년이었다. 나를 포함한 어머니와 동생 또한 정신적 외상이 가져온 자기 의심으로 인해 지난 3년 동안 외로운 싸움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아마도 평범한 삶의 시간에서 인생의 가장 기쁜 시간과 가장 슬픈 시간을 지나 지금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가장 사랑하는 또 한 명의 새로운 가족이 생겼고, 가장 사랑했던 한 명의 가족을 떠나보냈으니 말이다.
그런 만남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 속에서 내 안의 평온함을 유지하기에 나는 아직 몸만 큰 '애어른'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미숙함을 스스로 인정할 용기조차 없었던 그런 몸만 커버린 어른.
이제는 우리 옆의 행복을 온전히 느끼면서 지금 이 소중한 순간을 기억하면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