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도 이제 어른이 될게" - 육아휴직 여행기
에스토니아와 마찬가지로 헬싱키에서 2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또 다른 멋진 나라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올해 월드컵이 열리기도 했던 러시아다. 그중에서도 수도인 모스크바보다는 다소 생소한 도시이지만, 명실공히 러시아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로 우리는 2박 3일의 짧은 여행을 떠났다.
에스토니아와는 달리 러시아는 2박 3일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하기까지 우리 부부의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러시아는 지금까지 씸씸이와 함께해온 어떤 여행지 보다도 '안전'이 가장 걱정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인터넷도 뒤져보고 이미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 보아도 아이와 함께 가기 좋은 여행지로 추천할만한 곳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씸씸이와 함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이유가 딱 두 가지 있었다. 바로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마린스키 극장 발레 공연' 관람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평소 다른 어떤 교육 보다도 씸씸이의 문화적 소양을 키워주는데 가장 우선순위를 두기로 한 우리 부부이기에 두 여행코스는 정말 기대가 큰 곳이었다. 나름 이런 기회를 기다리면서 세계명화 관련한 동화책을 집에서 틈틈이 씸씸이에게 읽어주었고, 씸씸이도 자연스럽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매주 유치원에서 하는 발레 수업이 한 주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인 씸씸이에게 좋은 추억이 될 듯했다.
헬싱키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까지는 VR이라는 고속열차로 이동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행 라인을 알레그로(Allegro) 열차라고 부르는데 열차 예매 온라인 사이트가 다소 불안정하여 헬싱키 중앙역에 직접 방문해서 예약해야만 했다. 사실 열차를 예약하는 그 간단한 행위 자체만으로도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었다.
잦은 열차 예매 시스템의 접속 끊김 현상 때문에 숙소에서 혼자 애먼 노트북에 화풀이를 해야 했고, 약속 시간을 앞두고 방문한 헬싱키 중앙역에서는 노령의 역무원 분의 독수리타법 때문에 30분여를 기다린 끝에 간신히 가족석으로 예약하기도 했다. 헬싱키에서 흔하게 겪었던 이곳 사람들의 여유로움을 넘어선 오랜 기다림이었다. 대신 예약을 진행해주신 역무원 분도 미안했는지 여권의 한국어 이름이 낯설어 오래 걸렸다고 변명아닌 변명과 함께 끝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고속열차(VR) 예약 사이트
https://www.vr.fi/cs/vr/en/frontpage
러시아는 유로(Euro) 화폐가 아닌 루블(Ruble)을 사용하기 때문에 넉넉하게 헬싱키 중앙역에서 환불한 후 출발을 했다. 열차 내부는 우리나라 고속열차처럼 쾌적했다. 그리고 열차의 마지막 칸에 마련된 아이 동반 가족 열차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조그만 놀이 공간도 마련되어 있고, 씸씸이도 마주 보고 앉은 가족석이 재밌었는지 크게 지루해하지 않고 열차에서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씸씸이 아빠와 엄마에게는 학창 시절 금기의 땅으로만 배웠던 소련(소비에트 연방)을 지금 기차를 타고 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유독 삼엄한 군인들의 열차 안 검문이 불편하기도 했다. 핀란드 사람들의 무표정은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하지만 핀란드 군복, 러시아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두 시간 동안 다섯 차례는 여권 검문을 한 듯했다. 아이와 함께여서 좀 더 예민했을 수도 있지만 이런 긴장감이 우리의 첫 러시아 여행을 더욱 설레게 만들기도 했다.
식당칸에서 사 온 맥주 한 캔과 간식을 먹으면서 핀란드의 시골 전경을 감상했다. 2시간 반의 열차여행 시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는 호수들, 그리고 호수에 비친 핀란드 자연이 만드는 데칼코마니를 볼 때마다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열차에서 우리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또 다른 이국적인 풍경을 만끽했다. 언제나 그랬듯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이 지나가는 풍경을 마음속에 간직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우리 셋이 또 하나의 추억을 함께 만들고 있는 지금이 더없이 행복했다.
언제나 그랬듯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이 지나가는 풍경을 마음속에 간직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우리 셋이 또 하나의 추억을 함께 만들고 있는 지금이 더없이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