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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하면둘 Sep 28. 2019

러브레터

죽음 혹은 이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몇 번을 봐도 볼 때마다 다른 감상을 주는 영화가 있다. 내게는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가 바로 그런 영화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느껴졌던 것이 눈과 첫 사랑의 풋풋함이었다면, 이 후에는 계속해서 영화 속에 있는 죽음과 우울감이 눈에 밟혔다. 이 영화의 매력은 수도 없이 많다. 감촉이 느껴질 것만 같은 생생한 소품들, 홋카이도의 풍경,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이 영화를 가장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이 영화가 '첫 사랑과 죽음'이라는 상반된 테마를 다루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러브레터>는 가장 동떨어져 있을 것만 같은 이 둘의 상관관계를 가장 촘촘하게 엮어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가 기존의 로맨스 영화와는 다른 묘한 느낌을 준다.


<러브레터>의 첫 장면

죽음에서 삶으로

이 영화의 이야기는 다른 영화가 선택하는 방식과는 반대로 흘러간다. 보통의 멜로 영화가 시한부 인생의 주인공을 이용해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여정을 보여준다면, 이 영화는 거꾸로 죽음에서 시작해 삶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주인공인 히로코가 눈밭에서 검은 옷을 입고 숨을 참는 장면이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장면 역시 히로코의 약혼자인 이츠키의 2주기 추도식이다. 이는 이 영화가 누군가의 죽음으로써 시작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과거 이츠키가 자신의 첫 사랑에게 보낸 그림(일종의 러브레터)가 여자 이츠키에게 도착하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죽음에서 시작해, 결국 사랑으로 끝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죽음은 이 영화에서 사랑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보아야 한다. 약혼자의 죽음으로 인해 히로코가 편지를 쓰게 됨으로써, 이츠키(여)에게는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하는 것은 '기억'이다. 이츠키는 그 남자에 관한 어린 시절 기억을 하나 둘 씩 떠올리며, 여태까지는 알지 못했던 그 남자의 자신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 '기억'으로 인해서 이 영화는 죽음으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해피엔딩으로 다가올 수 있게 된다.


편지

인물들을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매개는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편지'다. 약혼자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은 '편지'로 인해 조금씩 삶으로 걸어나오게 된다. 편지는 한 쪽으로만 통하는 편도행 열차다. 그렇기에 편지를 먼저 쓴 사람인 히로코는 편지를 통해 자신에게 남아있는 옛 약혼자의 기억들을 떠내려 보내고, 편지를 받게 된 이츠키는 알지 못했던 사랑의 기억을 받게 된다. 그렇게 서로의 기억들을 주고, 받으며 그들은 죽음의 영향력에서 조금씩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또 한가지, 편지라는 매체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차다. 편지는 바로 그 편지의 대상에게 닿지 못한다. 이츠키(남)이 이츠키(여)에게 보낸 편지는 당사자에게 바로 닿지 못하고, 돌고 돌아 아주 긴 시간이 지나 후배들에 의해 발견되어 수신자에게 도착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차 덕에 두 사람을 둘러싼 수많은 추억들이 채워질 수 있었다.이츠키(남)은 편지가 도착하는 시간 동안 히로코를 만났고, 이츠키(여) 역시 학창시절 그녀에게선 찾을 수 없는 여유를 보여준다. 이처럼 편지가 낭만적인 매체인 이유는 그 시간 차 속에서 감정이든, 기억이든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것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별과 기억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총알이 심장을 관통했을때? 아니야..불치병에 걸렸을때? 아니지! 맹독 버섯스프를 마셨을때? 아니다!!그건 바로 사람들에게서...잊혀졌을때다.

너무 오그라들어서 이제는 밈으로 사용되는 원피스의 명대사가 있다. "사람이 죽는 건 바로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러브레터>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야 말로 저 대사와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죽음은 사실상 완전한 이별에 가깝다. 다시는 볼 수 없고, 만날 수도 없는 것이 이별이라면 죽음이야 말로 진정한 이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기억'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에서 사랑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 기억을 통해 다시금 우리를 찾아오고야 만다. 이는 이와이 슌지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한 가지 테마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기억이 남아있는 한 완전한 이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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