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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하면둘 Feb 15. 2020

빼기의 삶

    도대체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요사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인 친구들을 만나면 꼭 한번쯤은 나오는 대화주제다. 그것도 그럴 것이 월급은 쥐꼬리만한데 뉴스에선 이미 수억을 호가하는 아파트값이 점점 오르고 있다고 하고, 기술의 발전으로 구매욕을 자극하는 신비로운 물건(닌텐도 링피트, 로봇청소기 등등)들은 날마다 늘어나는 가운데, 우리에게 오르는 것은 월급이 아니라 나이뿐이니 말이다. 해리포터처럼 막대한 유산과 파이어볼트와 같은 신상품을 적시에 선물해주는 시리우스 블랙 같은 삼촌이 있다면 모를까, 우리들은 결국 온갖 마법 같은 물건들이 즐비한 다이애건 앨리 앞을 어슬렁거리며 그저 ‘어떻게 먹고 살지’라고 끙끙 앓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저께는 아는 형 한명이 이렇게 말했다. “조금 덜 먹고 살면 돼. 그러니까 간짜장 먹을 것을 짜장면을 먹으면 되는 거지.” 나는 “간짜장이 맛있긴 한데.”라고 대답했고, 형은 “돈 없으면 짜장면 먹어야지.”라고 되받았다. 그것은 형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으며,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이기도 했기에 매우 슬프게 느껴졌다. 3년이 넘는 백수생활을 해온 형이 비로소 불교적 해탈을 얻은 것일까. 그의 말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그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는 부처님의 말씀같았다. 물론 형은 인간적이니 짜장면 정도의 욕망은 허락해주긴 했지만, 두 사람의 의견은 본질적으로 같다.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더하느냐보다, 무엇을 빼야하느냐라는 것이다.


    옆 나라 일본에는 진즉부터 극단적인 ‘빼기’의 삶을 선택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만으로 삶을 이어가는 ‘프리터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프리터족은 거의 60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이 정도면 일종의 트렌드라기보다, 한 계층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어쨌든 비정규직으로만 살아간다는 말은, 인생의 많은 부분을 들어내며 삶을 이어나간다는 뜻이다. 남들보다 조금 덜 벌고 덜 먹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고용불안도 클 것이며, 그렇기에 가정을 이루는 일은 사실상 힘들다고 봐야할 것이다.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거의 모든 것을 뺀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들은 도대체 그 많은 것을 빼면서 무엇을 남겼을까.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소설 ‘편의점 인간’에서 20년을 넘게 편의점 알바로 살고 있는 주인공은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평생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평생 누구한테도 간섭받지 않고, 그냥 숨을 쉬고 싶어요. 그것만 바라고 있습니다.” 소설을 읽고 나는 어쩌면 프리터족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쟁취하지 않아도, 경쟁에서 승리하지 않아도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였다.


    그리하여 나는 내 자신을 돌아보며 나는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가 생각해봤다. 우선 ‘내 집 장만하기’같은 건 가장 먼저 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건 남들이 “우리나라에서 돈을 벌려면 부동산밖에 없어.” “강남 아파트 값이 20년 새 얼마나 많이 올랐는지 알아?”라고 말해서 괜시리 불안해서 갖고 있었던 의무 같은 것이었다. 사실은 여태 전세든, 월세든 임차인으로 살면서 크게 불편한 건 없었다. 오랜 꿈이었던 ‘홈 씨어터 구축’도 그냥 영화관을 자주 가면 될 일인 것 같고, ‘좋아하는 책 사기’는 굳이 포기하지 않아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부모님 용돈 드리기’는 가장 쉽게 포기가 되었다. 유교국가의 장남으로서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부분 매우 송구스럽지만, 예부터 생활력과 의지가 발군이셨던 두 분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문제는 ‘결혼해서 가족 만들기’인 것 같은데, 그건 포기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건 미래의 파트너 없이 나 혼자 생각해봤자 의미도 없을뿐더러 상의도 하지 않고 혼자서 계획을 세워버리는 건 예의도 아니니 벌써부터 고민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렇게 글로 쓰다 보니 내 자신이 ‘먹고 살기’라는 문제에 대해서 의외로 너무 막연한 공포감을 갖고 있었던 게 느껴졌다. 포기하기 싫은 일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작가 박해영의 작품에는 늘 상처 입거나, 트라우마가 있는 인물들이 이를 치유해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누군가가 왜 그런 이야기만 쓰시는가 물어보았을 때, 작가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자신에게는 무얼 얻어서 행복한 게 아니라, 무얼 놓아야만 행복해진다는 믿음이 있다고. 그녀의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는 욕망과 양심 사이에서 늘 양심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주인공 ‘동훈’이 나온다. 그는 회사에서 대학 후배이자 직장 상사에게 늘 갈굼 당하면서도 가족을 부양하지 못할까봐 찍 소리도 못하고, 부인이 바람을 피는 것을 알면서도 유학 가있는 아들이 마음에 걸려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행복해지는 순간은, 그가 지니고 있던 그 책임감이란 사슬을 놓아버릴 때다. 상사에게 시원하게 죽빵을 날리고, 부인의 바람을 잡아내며 관계를 끝낸다. 그의 삶은 분명 겉으로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지만, 그의 표정은 분명히 이전보다 밝아진다. 무엇을 놓아야 행복해질 것인가. 그걸 아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밖에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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