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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하면둘 Nov 08. 2021

러닝

휴식이 필요할 때

러닝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힘들어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는 게 힘든 일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은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두 번의 최종면접에서 연이어 쓴 잔을 들이켜야 했던 그때, 나는 처음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어있는 시간이 두려웠다. 시간이 날 때마다, 생각이라는 타임머신은 나를 면접장으로 되돌려 놓았다.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저렇게 했으면 합격했을까. 하지만 이런 저런 생각 후에 내게 남은 것은 한번 지나가버린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불변의 물리법칙을 다시금 절감하는 일뿐이었다.


그런 악몽같은 시간을 한, 두달쯤 보내고 나면 정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같은 말을 내뱉는 철학자가 미워지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데카르트는 본인이 후세의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알 리가 없다. 뭐 본인이야 귀족출신이라 별 다른 걱정도 없었을테지만, 당시 나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생각해야만 인간이라면, 인간이라는 지위를 기꺼이 포기하고 내가 갈 때마다 보이는 동물원의 사자라도 되고 싶었다. (꼭 내가 가는 시간 동물원의 사자는 한가롭게 잠만 잔다)


운동이라면 누가 시키지 않는 한 하지 않는 내가 가끔씩이나마 러닝을 하게 된 것은 아마 그때부터였 것 같다. 그전까지 내게 있어 러닝은 그저 살 뺄 때나 하는 고통스러운 유산소 운동일 뿐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뜀박질로 심장박동이 차오르는 그 시간만큼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조깅의 마약같은 점은 뛰면 뛸수록, 힘들면 힘들 수록 힘들다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예비군 대북 안보교육에서 늘상 배워왔던 북한의 화전양면 전술같았다. 한 곳을 혹사시킴으로써, 다른 한 곳의 아픔을 잊게하는 것이다. 제 한몸은 책임져야하는 다 큰 어른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면 어떤 장치라도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 장치가 누군가에게는 술일 수도 있을테지만 술은 숙취를 남기는 반면, 러닝은 건강을 남긴다는 장점도 있다.


요즘에는 참 다양한 러닝의 방법이 보인다. 다른 사람과 함께 뛰는 소셜 러닝이 유행이라고도 하고, 여러 어플을 이용해서 러닝과 관련된 챌린지를 서로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러닝의 매력이 결국 혼자서 시작한 일을 혼자서 끝낼 수 있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직장생활을 하든, 무얼하든 나이를 먹어갈 수록 나홀로 무언가를 매듭짓기는 더 힘들어진다. 러닝은 그 속에서 내가 내 몸 하나로 오롯이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이다. 내켰을 때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고, 내키지 않을 때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다. 러닝에 끝은 없기에, 도중에 그만두는 것은 그 자체로도 좋은 마무리가 된다. 혼자여도 괜찮은 것이 갈수록 없어지는 세상에서 러닝만큼은 혼자인 것이 다행스럽다.


쓰다보니 오늘의 주제가, '휴식이 필요할 때'였다는 것이 생각났다. 나이를 먹을수록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많은 걸 보면, 진정으로 편안함을 느끼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데 휴식에 대한 생각도 점점 바뀐다. 예전에는 몸이 편안한 시간이 휴식이라 생각했는데 요즘은 마음이 편안한 시간이 휴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러닝은 아주 효과가 빠른 진통제같은 휴식이다. 그러니 온갖 잡념이 머릿 속을 휘저어 놓는다면, 당장 주변의 경치 좋은 강변으로 달려가는 것을 추천한다. 긴 시간도 필요없이 단 10분만에, 당신의 머릿속에는 '졸라 힘들다'는 생각만이 떠오르게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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