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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쩨제 Feb 14. 2020

런던에는 책방이  오조 오억 개 있다

- Daunt Books(1)


위 제목은 과장을 한 꼬집 친 말이기는 하지만, 런던의 거리를 다니며 정말 많은 책방을 본 건 사실이다. 처음엔 ‘세계 책방 탐험’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아니라 한국에서 찾아 간 책방 한두 개 정도 다닐 생각이었는데, 책방과 전혀 상관없이 맛집을 찾으러 가는 길에도, 명소를 가던 길에도, 심지어는 그냥 산책을 하다가도 길을 조금만 걷다 보면 어김없이 책방이 보였다. 책방 하나부터, 한 골목에 책방 여러 개가 모여있기까지!


그렇게 여유가 있으면 길 가다 우연히 본 책방을 들어가고, 다른 일정이 급하면 사진 찍어 뒀다 다음 날 오고, 한국에서 찾아 뒀던 책방에 가고, 널널하게 짠 일정이 끝나면 구글 맵에 bookshop 또는 bookstore을 검색해서 주변 책방을 찾아가며 나의 책방 여행이 시작됐다.




길 가다 건너에 있어 나중에 가려고 대충 사진 찍어 뒀던 책방들.








파란 하늘이 보였다. 하얀 구름이 몇 개 지나가고 있었고, 겨울이지만 한국만큼 춥지는 않아서 겉옷으로는 보라색 코트 하나면 충분했다. 런던에 도착한 첫날에는 비가 많이 와서 악명 높은 영국의 겨울 날씨가 계속 이어질까 걱정했지만, 그 걱정이 무색할 만큼 이튿날은 한국의 가을 같은 청명한 날씨였다.


전날 밤부터 말썽을 부리던 유심칩 문제를 해결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근처 식당에서 샐러드와 차로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든든해진 배로 세인트 폴 성당을 찾아 걷다 보니 눈길을 끄는 간판이 보였다.

청록색 간판에 하얀 글씨로 써진 Daunt Books. 런던에서 만난 첫 책방이었다.


그 고풍스러운 청록색에 끌린 건지,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치 듯 책쟁이도 책방을 못 지나쳐서 그런 건지, 어느새 홀린 듯이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안에는 몇 명의 손님들이 있었고, 카운터에서는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문으로 한 발자국 들어왔을 뿐인데 바깥과는 또 다른, 조용하면서도 낮은 속삭임이 들리는 책방 속의 시간의 흐름은, 낯설게만 느껴졌던 주변의 소리들을 두근거리는 설렘의 순간들로 만들었다.


한국 책방에서 평온함을 느꼈던 것처럼, 따뜻한 나무의 색으로 둘러싸인, 조명까지 간판처럼 청록색을 덮은, 눈 앞이 탁 트이는 너른 매대가 보이는 이 안에서 서가 사이사이로 들어가 책을 하나하나 구경할 때만큼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게다가 생전 처음 보는 멋진 책들이 보물처럼 이곳저곳에 숨겨져 있어서, 첫 책방이니까 딱 한 권만 사야지 하며 다짐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책을 너무 많이 사버리면 이미 3분의 2쯤 차있는 내 키 반 만한 28인치 캐리어를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던져버릴 것만 같아서 정말, 정말, 눈물을 머금고 꾹 참았다. 그렇게 서가 한 칸을 쓸어오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며 아름다운 책들 중 골라 골라 이 곳에서 사 온 책은 표지부터 반해버린 <The Beauty and the Beast>.



이 책은 비닐로 싸여 있어 안을 못 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살 단 한 권의 책으로 고른 이유는, 같은 시리즈의 <정글북> 샘플을 봤기 때문이었다. 표지만큼 아름다운 일러스트들과 간간이 들어있는 마법 같은 장치들이 새로워서 <미녀와 야수> 도 분명 멋질 거야! 하는 기대를 품고 책방을 나섰다.





이 곳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청록색으로 그림이 그려진 비닐 봉투, 오늘의 일정이 끝날 때까지 옆에서 바스락바스락거리던 비닐 소리, 팔 아래로 묵직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책의 무게가 기분 좋게 함께한 하루를 끝마치고 숙소로 돌아갔다.


도착하자마자 들뜬 마음으로 비닐의 벗겨낸 책은 따스한 봄의 햇살 아래서 며칠 둔 것 같은 아름다운 말린 장밋빛이었다. 각 챕터의 첫머리 글자는 표지와 같은 말린 장미색으로, 그 주변에는 모양을 내는 선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중간중간 보이는 책의 내용을 담아낸 일러스트들과 꽃무늬의 패턴들, 책의 페이지를 나타내는 숫자 위에 그려진 세심한 그림까지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답고 조화로운 모습에 책이 아니라 작품 같았다. 거기에 책의 군데군데 보이는 팝업북과 같으면서도 다른, 직접 만져보고 들여다보고 움직여보면서 책의 내용을 더욱 다채롭게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여러 재미있는 장치들이 돋보이는 책이었다.






낯선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방, 그리고 그곳에서 내 마음을 흔든 멋진 책을 만난다는 건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기억하는 일이고, 기념하는 일이다.

이 글을 쓰며 나는 한국의 내 안락한 방에서, 소파에 푹 기대앉아 이 말린 장밋빛의 아름다운 책을 다시 열어보았다. 아마도 좀 더 비싸긴 하겠지만 이 책을 한국에서도 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 책을 샀다면 지금과 같은 느낌은 받을 수 있었을까?


이 책이 특별한 건 외국 책이라서가 아니라, 그 날의 기억이 묻었기 때문이다. 내 주변의 낯선 공기와 서늘한 바람, 반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과 멀리서 들리는 성당의 종소리, 색색의 그림처럼 흩어지는 햇볕과 이르게 찾아온 어둠에 두려워지는 마음.


그 날의 하루가 묻은 이 책을, 나는 추억한다.











Daunt Books
61 Cheapside, London EC2V 6AX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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