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는 정말 싫어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어두컴컴하고 지루한 겨울날이 계속되는 요즘 , 한국과 사뭇 다른 이곳의 날씨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한국처럼 뚜렷하진 않지만, 스위스도 사계절이 있다. 스위스의 사계절은 어떻고, 사람들은 뭘 할까?
*봄(대략 3월 초부터 5월 말까지)
-2월의 우울한 날씨가 걷히고 여기저기 푸른 잎이나 꽃망울이 보이기 시작하면 봄이 왔다는 신호. 여기저기 자전거 여행과 산책,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본격적으로 정원과 발코니를 가꿀 시점. 스위스 사람들은 정원/발코니 가꾸기에 진심이어서, 조금이라도 땅뙈기만 있다 싶으면 앞다투어 뭔가를 심어대기 시작한다. 가장 흔히 보이는 식물은 단연코 제라늄. 바질, 로즈마리, 에스트라공 등 요리에 쓰이는 허브류도 많이 심는다. 이제 서서히 호숫가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는 때. 그러나 그늘에 들어가면 아직도 서늘을 넘어 '싸늘'한 기운이 느껴질 때도 있으니 바람막이는 필수. 우박도 꽤 내린다. 난 우박이라는 기상 현상을 스위스 와서 처음 겪었는데, 차창을 때려 부술만큼 큰 우박이 내리기도 하니 봄에는 조심해야 한다. 딸기를 겨울에 먹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여기는 딸기가 3월부터 나오기 시작해서 6월 중순까지 이어진다. 자동차 도로 옆에 커다란 딸기 모형이 서 있다면 거기가 바로 딸기밭(또는 딸기 하우스). 인건비를 줄이려 딸기를 자동판매기에 넣어서 팔기도 한다. 숲에 명이나물이 가득 자라서, 한국 사람들은 '아니, 이 귀한 것을!' 하며 장아찌를 만든다...
4월에는 '젝세로이텐(Sechseläuten)'이라는 큰 행사가 열린다. 취리히 광장에 모여 겨울을 상징하는 눈사람 모형인 '뵉(Böögg)'을 불태우면서 본격적으로 봄을 맞이하는 행사. 이 뵉이 얼마나 빨리 타느냐에 따라 그 해 여름 날씨를 점친다.
서늘함과 따스함이 적당히 공존하고, 해도 길어져서 모두가 설레고 즐거운 시즌.
*여름(대략 6월 초부터 8월 말까지)
-바야흐로 스위스인들의 최애 계절이다. 스위스의 여름은 우리나라처럼 덥고 습하지 않고 적당히 건조해서 쾌적하다. 자전거, 피크닉, 하이킹, 강 수영, 뱃놀이, 바베큐 파티를 하며 거의 밖에서 여가 시간을 보낸다. 여름의 취리히 호숫가는 항상 인파로 바글바글. 발코니나 정원에 야외용 테이블과 벤치를 놓고 아페로(Apero, 간단한 핑거푸드와 함께 즐기는 식전주)타임을 갖는 일이 잦다. 거의 비가 오지 않고 맑은 날씨가 이어진다. 여름 대표 과일은 단연 복숭아. 스위스의 복숭아는 당도가 높고 물기가 적당하여 맛이 매우 좋다. 이탈리아/스페인에서 수입하는, 유럽 여행 온 우리나라 여행객들에게 인기 많은 '납작복숭아'도 제철.
2년에 한 번 오는 '취리히 페스티벌(8월)', 매년 열리는 지역 축제 '알바니 페스트(6월)', '취리히 오픈 에어', 기타 크고 작은 음악 축제 등 페스티벌도 많아서 놀 일이 잦다. 일년 치 놀 것들을 여름에 다 몰아서 작정하고 정성껏 노는 느낌이다.
*가을(대략 9월 초~11월 말까지)
-햇살은 따사롭고, 그늘은 시원한 계절. 집 근처 숲에서 승마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낮에는 온도가 꽤 올라가지만, 저녁에는 싸늘해서 일교차가 크다. 다람쥐가 별로 없는지, (한국이었으면 사람들이 싹쓸이해갔을) 밤이며 호두, 도토리가 후두두 떨어져 땅에 굴러다닌다. 11월 중순이 되면 낙엽이 예쁘게 물들어 가을의 절정을 느낄 수 있다. 본격적으로 날이 짧아져 우울증세가 시작되는 시점. 10월 마지막날 서머타임이 종료되어 한국과 7시간 시차에서 8시간 시차로 바뀐다.
가을을 대표하는 과일은 사과. 사과는 스위스 전역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스위스인들의 최애 과일이다. 부사가 대부분인 우리나라와 달리, 여기는 사과 종류가 매우 많고 맛도 좋다. 다양한 사과를 먹어보면서 깊어가는 가을을 만끽하는 재미가 있다.
*겨울(대략 12월 초~2월 말까지)
-겨울이래봤자 한국처럼 혹한이 없어서, 나처럼 대한민국의 익스트림한 날씨에 익숙한 사람에겐 '겨울인데 그렇게 안 춥네?'하는 정도다.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흔치 않아서 한국에서 가져온 오리털 점퍼가 몇 년째 장롱에 처박혀 있다.
아시아를 대륙이 아니라 '한 나라'로 생각하는 스위스 사람들은 아시아 하면 떠오르는 게 태국 같은 따뜻한 이미지인지라 내게 '스위스 추워서 어떡하니, 지내기 괜찮니?' 자주 물어보는데, 영하 17도로 내려간 우리나라 한파 뉴스를 이야기 해주면 눈이 휘둥그레진다(최근 평창동계올림픽까지 개최한 나라인데 '한국도 눈 오니?' 물어보는 사람들 정말 많다. 제발 공부 좀 해줘).
2020년 12월은 코로나의 반사작용인지 유독 눈이 많이 왔지만, 요 몇 년 간 스위스의 겨울엔 눈보다 비가 더 많이 내렸다. 비가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온다. 그런데 우리나라처럼 겨울이 건조하지 않고 습한 상황에서 비가 오니 온도가 그리 낮지 않은데도 한기가 뼛속으로 스미는 느낌이다. 흐리멍텅하고 잔뜩 찌뿌린 하늘이 잦은 현실에, 활동적인 스위스 사람들도 별 수 없는지 겨울 되면 자살율이 엄청 높아진다. (아무도 성당에 가지 않지만) 명색이 카톨릭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여서 (게다가 겨울엔 놀 기회가 별로 없다보니) 크리스마스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이 시즌의 행사는 단연 '크리스마스 마켓'. 넓은 터를 잡아 크리스마스 전까지 글뤼바인과 퐁듀를 비롯한 갖가지 먹거리, 수공예품, 차 등을 파는 일종의 시장이다. 코로나 때문에 지난 2년 간 행사가 계속 취소된 상태인데, 길고 지루한 겨울에 그나마 응급처치를 해 주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지 않으니 허전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특히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후후 불며 먹는 '압펠퀴흘리 apfelchüechli(링모양으로 썰어 튀긴 사과 위에 따뜻한 바닐라 소스를 뿌려먹는 단과자)' 맛은 1년을 기다리는 즐거움이건만 그 기쁨이 사라지니 겨울이 퇴색해버린 느낌이다.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더 많이 놀고, 더 많이 웃었을 스위스 사람들.
워낙 바깥 활동을 즐기는 민족성 탓에 이번 겨울이 유독 더 길게 느껴질 것 같다. 다가오는 봄에는 코로나의 그늘에서 벗어나 조금 기지개를 켜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