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 먹고살기
아기를 낳은 지 두 달이 흘렀다. 그동안 수유하느라 몸이 허해져서인지 갈비탕, 추어탕, 삼계탕, 설렁탕, 돼지국밥, 순대국 등등 국물을 푹 우려내 만든 한국식 탕 종류가 너무너무 그리웠다. 그러나 스위스에서는 일단 재료도 구하기 쉽지 않거니와, 완제품을 파는 곳도 없으니 이런 게 먹고 싶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내가 직접 만들어야한다. 출산 후 다 회복되지 않아 시큰대는 손목과 골반으로 이 모든 수고를 할 자신도, 기운도 없는데 하필 이런 음식들이 간절한 현실이 서글프고 원망스러워서 '한국 음식 먹고싶어!'를 외치며 남편 앞에 엎디어 엉엉 울었다. 이곳에선 육아보다도 이놈의 '먹고사니즘'이 더 힘들다.
옆나라 독일, 프랑스만 해도 족발에 짜장면, 치킨까지 파는 한식당과 한국 슈퍼마켓이 즐비하건만, 국가 규모도 작은데다 교민 수에서 두 나라와 비교도 안되는 이곳 스위스에서는 그럴싸한 메뉴를 구비한 한식당도 찾아보기 힘들고, 무엇보다도 식욕을 한순간 사그라들게 하는 사악한 가격때문에 한식은 사먹지 않게 된다. 다양한 제철 식재료로 만든 반찬을 여러 개 깔고, 따뜻한 국이나 찌개, 탕을 곁들여 든든하고 영양가 있게 배를 채우는 한국 음식. 해외 생활을 하다보면 나도 몰랐던 내 안의 한식 DNA가 발현되는 걸 알 수 있다. 나도 여기 오기 전까진 내가 소위 '국제 입맛'이라며 한식 없이도 잘 살거라 자부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에 적어도 한 끼는 한식을 먹어야 식사다운 식사를 한 것 같다. 파스타, 치즈, 피자, 이딴거 다 필요 없고 오로지 밥심으로 사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 나는, 스위스에 살면서 다음과 같은 음식들이 그립다.
다양한 해산물
스위스는 험준한 산이 많고 땅이 척박한데다, 무엇보다도 바다가 없어서 식재료가 매우 빈곤하다. 해산물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아 바닷것은 안먹는(못먹는) 사람도 수두룩하다(일례로 남편은 미역과 김이 바다냄새가 심하다는 이유로 먹지 못한다-다만 미역국, 조미김, 김자반은 못먹으면서 김밥은 먹는 이율배반적 인간). 고기보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나로선 너무나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해산물 전문 마켓에 가도 우리나라처럼 다양한 해산물이 없고 이들이 즐겨먹는 흰살 생선 위주로만 판다. 등푸른 생선은 비린내가 심하니 해산물과 친하지 않은 스위스 사람들에겐 진입장벽이 높아서 찾기도 쉽지 않다. 그나마 고등어는 참치와 더불어 캔으로 판매해준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
바다는 없어도 호수와 강이 많다보니 여기서 잡은 생선들을 팔긴 하지만, 민물고기인지라 흙냄새가 나서 바다생선에 익숙한 내겐 아쉬운 맛이다. 생선 조리법도 크림 소스 아니면 토마토 소스, 그냥 소금 구이 이렇게 세 가지 중 하나다. 생선 자체도 재미없는데 조리법도 재미없으니 먹는 즐거움이 크지 않다.
한국식 치킨
한국인에게 치킨은 소울푸드로 자리잡은지 오래. 그러나 이곳에서 한국식 치킨은 사치다.
취리히의 힙한 거리, 유로파알레에는 '미스 미우(Miss Miu)'라는 아시아 식당이 있다. 가게 이곳저곳에 '짓궂은 한국 사람들'이라는 다소 갸우뚱한 문구와 함께 한국식 식당임을 내세우고 있으나 오픈키친을 들여다보면 즉각 알 수 있다. 이곳은 한국인 조리사가 한 명도 없는 '짝퉁 한식당'이라는 사실을. 식당 자체는 한국인+일본인 부부로부터 시작되었을지언정, 서빙되는 요리는 한국인이 보기엔 한식을 어설프게 흉내낸 국적불명의 음식이다. 설상가상으로, 메인 요리가 나오기 전에 먹는 전채 요리 메뉴에는 '사회적 공유(아마 같이 '나눠먹는' 음식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듯)'라는 구글 번역투의 한국어가 적혀있어 메뉴판을 연 한국인들의 실소를 자아낸다.
그러나 이렇게 어설픈 곳이 놀랍게도 취리히에선 나름 성업 중이며, 취리히에서 '한국식' 치킨을 맛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식당이기도 하다. 치킨이 너무 그리워 수혈이 필요했던 날, 이곳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시켜먹은 치킨은 한국의 치킨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다행히 그럭저럭 먹을 만 했다. 다만 겨우 9조각에 3만원 가까운 사악한 가격이 먹고난 뒤 현타를 부를 뿐.
반찬 가짓수 많은 백반
나처럼 집에서 요리를 주로 담당하는 사람들은 가끔 '내가 만든 음식이 먹기 싫어지는 날'이 있음에 공감할 것이다. 이럴 때 한국이라면 주변에 널린 식당이나 반찬가게에서 뭐든 사오면 될 일이지만, 이곳에선 어림없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모든 걸 다 내 손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안그래도 손 많이 가는 한식 반찬들을 끼니마다 서너개씩 만들 순 없으니 대부분의 식사는 한 접시로 끝나는 간편한 일품요리로 귀결된다. 그동안
~볶음밥, ~덮밥, ~카레, ~비빔밥 등 일품요리가 가능한 모든 건 탈탈 털어 다 해먹은 것 같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젓가락을 어디로 놀릴지 행복한 고민을 해야하는, 반찬 가득한 상차림이 그리울 밖에.
콩나물
콩나물은 스위스에서 매우 귀한 식재료다. 텃밭에서 깻잎 키우는 데 성공해서 깻잎은 원없이 먹고 있지만, 콩나물은 재배 난이도가 높아 지난 8년 간 먹어본 기억이 손에 꼽는다. 콩나물을 양껏 먹고픈 마음에 한국서 콩나물 재배 키트와 전용 콩까지 사와서 길러봤으나 콩나물 특유의 아삭거림이 전혀 없이 작은 키에 잔뿌리만 무성한, 식감 제로의 잡초맛 콩나물을 몇 번 생성한 뒤 집에서 콩나물 키워먹는 건 포기했다.
독일만 해도 한인마트에서 콩나물을 파는데, 이곳 취리히의 한인마트에서는 콩나물 같은 예민한 신선식품은 취급하지 않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통조림 콩나물만 판다...통조림 속에 들어있는 콩나물이라니, 이 무슨 끔찍한 혼종인가). 겨울이면 콩나물이 잔뜩 들어간 묵은지 돼지고기김치찌개가 너무너무 먹고싶건만.
짜장면과 탕수육
한국식 중화요리도 그리움의 대상이다. 짜장면은 춘장을 사다 직접 볶고 생면까지 구해서 만들어봤지만 사먹는 짜장면 특유의 (건강엔 안좋으나 맛있는)맛과는 차이가 있다. 탕수육도 마찬가지. 무엇보다도, 중화요리 좀 먹어보겠다고 만족스럽지도 않은 결과물을 위해 노력과 시간, 에너지를 들이기 아깝다. 한국에선 가장 대표적인 배달음식인 중화요리가 이곳에선 맘먹고 만들어야 겨우 먹을 수 있는 특별식이라니, 너무 서럽다.
붕어빵
요즘처럼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공기가 느껴지면, 어김없이 붕어빵 같은 풀빵류 간식이 떠오른다. 추운 겨울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트럭에서 한 봉지 사서 그 온기로 언 손을 녹이며 뜨거운 팥고물을 호호 불어 먹던 추억의 붕어빵과 국화빵. 팥을 먹지 않는 이곳에선 꿈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음식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기 사람들도 밤은 즐겨 먹어서 군밤으로 그럭저럭 버틸 수 있다는 사실. 스위스에는 의외로 밤을 응용한 간식이 많은데, 밤과 설탕, 우유를 섞어 파스타면처럼 길게 뽑아낸 뒤 차게 먹는 디저트, '버미셀리(Vermicelles)'가 대표적이다.
위에도 언급했듯, 스위스는 지형과 토질 특성 상 옛부터 식재료가 많지 않아서인지 식문화적 상상력도 빈곤한 것 같다. 고기, 감자, 빵, 파스타, 피자, 샐러드(야채류), 이렇게 여섯 가지만 줄창 돌려가며 먹는데다, 심지어 베이커리류도 종류가 많지 않아서 스위스에서 두어달 체류하다보면 이곳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전채요리부터 디저트까지 거의 대부분 파악할 수 있다.
해외살이가 길어질수록, 한국인들이 얼마나 먹는 것에 진심인 먹보 민족인지 절실히 깨닫게 된다. 이 재료, 저 재료 섞어 새로운 맛을 창조하고, 신선한 비주얼을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 신제품과 신메뉴도 끊임없이 개발해내는 한민족. 안 먹어본 맛과 재료에 엄청나게 보수적이어서 매번 먹는 것만 먹는 (노잼)스위스 사람들에게 한국의 다채로운 식문화는 컬처쇼크로 다가갈 게 틀림없다. 하지만 난 그 덕에 한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 날로 깊어져가니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