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 케이팝 꿈나무를 만났다
며칠 전 스위스 TV뉴스에 흥미로운 내용이 나왔다. 베른에 위치한 작은 마을, 이젤트발트Iseltwald를 찾는 관광객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소식이었다. 대한민국의 인기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에서 현빈이 (뜬금없이)피아노를 연주하던 그 호숫가가 바로 이 이젤트발트에 위치한 까닭이다. 뉴스는 말레이시아, 중국 등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현빈이 피아노를 치던 호수를 배경으로 앞다퉈 인증샷을 찍는 장면을 내보내면서 마을 호텔은 요즘 빈 방이 없을 정도고, 늘어난 관광객 수요를 소화하기 위해 버스가 증편되고 마을 공중화장실 청소 인력도 늘렸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한국 드라마 한 편이 로컬들도 잘 모르는, 인구 500명도 안되는 이 작은 마을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온 셈이다.
한류-한국의 대중문화가 해외에서 인기리에 소비되는 현상. 최근 <오징어 게임>이 에미상을 수상했듯, 이제 아시아는 물론 북미와 유럽 대도시를 중심으로 K팝과 K드라마, K영화로 대표되는 한류가 자리잡았다. 새로운 것에 별 관심이 없고 매우 보수적인 국민 성향과 유럽인 특유의 오만함을 지닌 스위스지만, 이곳에도 한류의 물줄기는 서서히 흘러들어와 사람들의 마음을 시나브로 적시고 있다.
<이태원 클라스>는 이곳 청소년들 사이에 한국어 '괜찮아'를 유행시켰고, <오징어 게임>은 아시아 컨텐츠를 찾아보기 힘든 스위스에서까지 인기를 누렸으며, 영화 <버닝>과 <미나리>, <기생충>은 스위스 전역의 극장에 걸렸다. BTS 또는 한글 단어가 씌인 티셔츠를 입은 청소년을 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고, 아시아 마트에서는 한국 아이돌 굿즈를 팔며, 취리히 시내 아시아 음식점에선 K팝이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한국어 수업을 듣는 성인들도 늘어나고 있고, 한국 아이돌과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페이스북 그룹도 있다. 작년에 한국에 갔을 때는 K팝과 한국어가 좋아 무작정 한국에 왔다는 스위스 20대도 만났다.
출산 후 병원 산후조리실에 있었을 때 침대 시트를 갈아주러 온 티베트 출신 간호사는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시트 가는 일도 잊고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 이민호와 드라마 <스타트업>에 대해 폭풍 수다를 늘어놓았다. 우리 텃밭 바로 옆 이웃인 스리랑카 가족의 10대 딸, '사프리아'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Wirklich?(진짜요?)'를 연발하더니 자기는 블랙핑크의 찐팬이다, 그 중에서도 리사를 특히 좋아해서 학교 친구들이 아예 자신을 리사로 부른다는 사실을 줄줄이 이야기했다. 날 놀라게 한 건 사프리아의 장래희망. 사프리아는 16세 되는 해 한국에 가서 연예기획사가 주최하는 오디션을 보고 K팝 아이돌이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이제 겨우 14살인데 너무 구체적으로 꿈을 꾸고 있는데다 그 눈빛 또한 너무 확고해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났다. 블랙핑크의 신곡이 발표될 때마다 영상을 보고 또 보며 모든 안무를 익힌다는 대단한 아이다.
철옹성 같던 스위스 사회에 한류의 영향력이 조금씩 퍼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지만, 한국에 대한 이들의 지식과 편견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대다수의 스위스인들에게 한국은 '북쪽의 그 사람'이 먼저 떠오르는 나라이고,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아시아 국가는 여전히 일본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세련된 나라=일본이라는 공식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고, 일본이야말로 동양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여겨 우키요에 같은 일본 예술품 전시도 자주 열리며, 한국의 전통 의상인 한복을 '코리안 기모노'라 표현하고, 한류와 별개로 일본 빼면 한국, 중국, 태국이 다 비슷비슷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한때 우리가 J팝을 듣는 사람들을 '특이한 취향'이라고 여겼듯, 이곳 또한 K팝 팬들을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경향이 짙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한국의 것이 계속 널리널리 위세를 떨쳐서 무지몽매한 스위스 사람들도 언젠가 계몽될 날이 오기를 바란다. 빌보드, 칸느, 아카데미, 에미, 넷플릭스를 두루 섭렵한 한국 문화의 힘이 배타적인 스위스 사회에 더 깊이 스며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