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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뭄씨 Jun 09. 2023

물 건너 제주에 온 투쁠 한우택배

매일매일 맛있는 밥상머리 사랑

   


  오후 5시 30분. 이 시간이면 딸 어린이집 하원을 위해 하던 일을 갈무리하고 어린이집에 갈 채비를 합니다.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엄마의 기척에 귀 기울일 아이의 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빠졌습니다. 새로 산 운동화를 구겨 신고 현관문을 바삐 나섭니다.

  ‘덜컥’  그날따라 문 앞에 묵직한 무언가 걸렸습니다. 잘 열리지 않는 문틈사이로 몸을 비적거리며 빠져나와보니 스티로폼 박스 하나가 우리 집 문지기 행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휴대폰을 보니 역시나 미처 챙기지 못한 문자가 담겨있었네요.    

  

  [배송완료]

  ‘내일 올 줄 알았는데...’

  사실 오늘 오전에 대구로부터 발송된 택배가 제주에 접수되었다는 톡을 받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육지 택배배송 속도가 5G라면 제주도는 2G 수준이기에, 이사한 후 유통 물류에 대한 기대는 많이 내려놓은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도내 배송은 느긋하게 마음먹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기대보다 잰걸음에 와준 택배상자가 대견했습니다. 스티로폼을 찬찬히 살펴봤습니다. 어찌나 꼼꼼하게 테이프로 마감을 해두셨는지 스티로폼 상자 통째로 한 커플 비닐 옷을 입힌 것 같습니다. 이거 테이프 떼어내려면 대공사를 한번 해야 할 것 같아, 정리는 우선 어린이집을 다녀와서 후일을 도모하도록 합니다.      


  “이거 봐, 엄청 큰 택배야”

  ‘띠리링 취익 ㅡ.’현관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택배상자를 든 남편이 등장.

  드디어 택배박스가 우리 집에 입성했습니다.      

  가위로 비닐을 한참 벗기고 나서야 택배 안의 꽉 찬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설렁탕 소분 3 봉지, 고디국 2 봉지, 더덕무침 2 봉지, 장조림 소분 3 봉지. 그리고 치마살 3팩, 안심 5팩, 등심 2팩, 양지 2팩, 육전거리 2팩, 돼지도 삼겹살, 목살 나란히 나란히. 딱 봐도 황금비율 마블링이 영롱한 한우와 갓 잡은 신선한 돼지고기가 진공포장되어 배송되었습니다. 한약을 받은 것보다 더 든든해집니다. 발송인은 대구 사는 김 여사님, 우리 엄마입니다.      



  친정은 20년 넘게 이어진 유서 깊은 한우식육식당입니다. 사실 다른 장소에서 운영경험까지 합치면 엄마, 아빠는 30년 경력에 빛나는 축산업계의 베테랑입니다. 이제는 200두가 넘는 축산농가도 있는 큰손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더없이 자랑스럽게 부모님의 가게를 소개한다지만, 사춘기 무렵엔 부모님의 직업은 가능하면 꽁꽁 숨기고 싶은 저의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손님들에게 굽신거리며 고기를 취급하고 있는 엄마, 아빠를 보는 게 그렇게 미웠습니다. 학교에 엄마 직업을 ‘가정주부’로 적었다 들키기도 하고, 길에서 슬쩍 모른 척도 해보고 온갖 못난 짓은 다 하는 배은망덕한 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땐 왜 그렇게 어렸는지... 저녁시간 물 건너온 한우를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자니, 못난 딸내미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꼭꼭 눌러 보낸 엄마의 맘이 자꾸만 새어 나와 맘이 순두부처럼 몽글몽글해집니다.      


  “엄마, 왜 이렇게 많이 보냈노.”

  괜히 핀잔을 해보지만, 엄마는 더 보낼 게 있으니 얼른 먹어치우라고 몇 번씩이나 당부했습니다. 곁에 있으면 살뜰하게 챙겨주는데 멀리 제주도를 보내는 바람에 임신한 딸 못 챙겨줘서 아쉽다고 합니다. 이어 어릴 때도 못 챙겨주고, 궁시렁 궁시렁하는 엄마의 단골 레퍼토리가 이어집니다. 엄마는 어린 시절 가게 일 때문에 도시락을 못 싸줄 때가 많았고 도시락을 스스로 싸도록 해서 학교 보냈던 것을 아직 미안해하십니다. 당연히 제가 싼 도시락은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런 과거에 대한 부채감인지 어쩐지 엄마는 한우 택배를 보낼 때면 저 세상 열정을 불태웁니다. 그렇게 엄마와 딸은 세월을 쌓아가는 더 많이 동안 서로에게 미안해하고, 아물고, 정들고, 사랑합니다.       


  

불고기, 로스구이, 설렁탕....

  요즘 거의 매일 우리 집은 초콜릿처럼 투쁠 한우를 꺼내먹고 있습니다. 외식 물가가 비싼 제주도에서 엄마의 택배는 밥상의 ‘믿을 구석’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매일 엄마 손맛을 제대로 보는 하루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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