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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쎄오 Oct 01. 2022

ESTJ가 신경정신과를 찾은 이유

이혼으로 가는 길


정확히 어느 시점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한 건 감정과 이성이 뒤죽박죽이 되고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것 같은 정신 상태였다 정도가 되겠다.


하루의 대부분을 운전을 하며 고객과 미팅을 하러 다니던 시절. 그날도 어김없이 서울 구로구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날 좋은 오후였는데 운전을 하는 내내 한 가지 위험한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사고가 났으면 좋겠어. 내가 여기서 조금만.. 아주 조금만 핸들을 꺾으면 되는데...'


사고 후 며칠간의 코마 상태에서 깨어난 나는 가족과 친구들로 빙 둘러싸인 병실에서 눈을 떴을 것이고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어쩌다 이지경까지 오게 된 것인지를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한테 친구의 잘못을 일러바치듯 고해내며 가슴속 깊이 맺힌 응어리를 쏟아냈을 것인데...


'정신 차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넌 지금 도움이 필요한 상태야!'




그렇게 하루 일과를 마치고 무언가에 홀린 듯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신경정신과를 찾아들어갔다. 나는 지금 분명 어딘가가 너무 아픈데 병명이 없으니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했다간 꾀병 또는 약해 빠졌단 소리만 들을 것 같아서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아픈 것인지 전문의의 진단이 필요하단 판단이 들어서였다.

자해를 고민하던 이 순간에도 사고를 주관하는 영역 T(Thinking)이 발휘되다니... 소름 끼치는 MBTI의 정확성이란.

참고로 나는 극단적 ESTJ 성향으로 감정보단 이성이 굉장히 우세적인 사람이다.


**해당 MBTI는 2015~6년 즈음 신경정신과에서 한 테스트였으니 지금은 조금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트렌드 중 하나인 MBTI를 기준으로 내가 경험한 사람들의 캐릭터를 이야기해 보는 것도 꾀나 재미난 작업이 될 것 같으니 그건 나중에 본격적으로 한번 다뤄보기로 합니다. 기대하세요 :)




본래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첫 번째 내담은 왜 내가 이곳을 찾아왔는지 나의 현재 정신 상태와 주어진 환경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고 그 이후로는 여러 가지 테스트가 이어졌는데, 그중 하나가 MBTI였고 또 다른 하나는 요즘 TV에서 자주 뵙는 오은영 박사님이 주로 언급하는 MMPI 검사였다. MMPI의 500여 개가 넘는 질문 중 문장을 완성하는 형태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문장은,


내가 생각하는 남자란 무책임하고 쓸모없는 사람이다. 


당시의 나는 전남편과 이혼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던 시기였고 마음적으로 너무나 괴로운 상태였기 때문에 그때의 내가 생각하는 남자란 존재는 딱 저 정도였을 게 당연한 거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만약 어디에선가 우연히 이 글을 보고 있을 여보, 사랑합니다. 쓴웃음)


그 이후로 여러 차례 개인 면담과 남편과 함께하는 부부 상담이 이어졌는데 결국 우리는 제대로 마무리를 하지 못했고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나에게 하신 말씀이 나의 상태를 너무나 명확하게 알게 해 주었다.


"쎄오씨는 의학적 도움보다는 법률적 도움이 필요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제가 더 이상 해드릴 것이 없어요."

"아니에요 선생님, 전 분명히 어딘가 많이 아플 겁니다. 우울증이나 뭐 그런 게 아닐까요...?"

"음... 전혀요. 쎄오님 같은 성향은 우울증이나 자살 같은 걸 생각할 사람이 아니에요. 자아가 아주 건강합니다."

"네... 그렇군요..." (-_-;)


내심 병명을 진단받길 바랬던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디가 아픈 질 알아야 약도 먹고 그에 따른 적절한 치료도 받을 텐데 분명 난 어딘가 많이 아픈 것 같은데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니 너무나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종종 심박이 불규칙하게 뛰고 가슴이 답답한 것을 경험해 부정맥 검사도 받았으나 역시나 정상이란 판정을 받았고 아랫배가 아픈 것 같아 산부인과 검사도 받았으나 이상무.

근래 TV에서 오은영 박사님의 프로그램을 보고 안 사실이지만 나의 이러한 상태를 신체화라고 하는 것 같았다. 심리 조건에 따라 신체증상이 발생하는 상태로 당사자는 다발적으로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인데 역시 난 꾀병이 아니었던 걸로...




이혼을 결심하고 준비하는 과정 중 처음으로 접하는 다양한 종류의 감정의 쓰나미로 세차게 흔들리기도 했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일정기간 동안은 대인기피증도 겪었던 나였다.


완벽히 서류가 정리가 되고 나서는 내 감정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간간이 들려오는 지인들의 이혼 소식에는 여전히 마음이 쓰리고 아파왔다.

왜 아프지 않았겠는가. 왜 힘들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갈라서지 않으면 내가 몹쓸 병에라도 걸릴 것 같거나 이대로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그땐 이혼을 할 때라고 이야기하곤한다. 절대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게 아니라 지금 안 하면 정말 죽을 것 같아서 하는 게 내가 경함 한 그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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