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iestar 씨애스타
Nov 02. 2022
인생이라는 재즈를 연주하려면...
i Magazin 02 내게는 여전히 어려운 남자 사람
사람들이 나를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남자에 대한 것이다. 일단 내게는 멋진 남자가 없었고, 지금도 없다. 그냥 다 사람으로 보인다. 십 년을 넘게 같이 일을 한 사무실 팀장은 오래 지켜봐서 안다. 내가 남자 사람을 남자로 보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을.
‘저 남자 멋지지?’
‘왜요? 뭐가 멋진데요?’
‘너무 매력적이지 않아?’
‘어떤게 매력인데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건데요. 매력을 느끼면 어떤 기분이 들죠?’
...
그 대목에서 대화가 끊긴다. 대학교 때에는 심각한 얼굴로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아보라는 이야기를 여러번 들었다.
‘너 뭔가 문제가 있는거 아닐까?’
‘왜?’
‘남자를 보면 설레지 않는다는거?’
‘왜 설레야 하는거야?’
‘너 석녀가 아닐까? 심장이 돌이거나...’
‘나 잘 웃고 잘 울잖아?’
‘남자만큼은 니 심장이 돌이야.’
‘뭐, 사는데 불편하지 않아.’
...
살아보니 알겠다. 분명 이건 병이다. 이 병의 발명 원인은 아버지와 내가 자랄 때 본 주변 남자 어른들에게 있다. 그분들은 남자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품지 못하고 버리게 했다. 지금은 창원으로 통합된 내 고향 마산은 남자들이 대부분 한량인 도시였다. 엄마가 중매로 일주일만에 마산으로 시집올 때 필수 혼수는 고무 다라이(김장할 때나 아이들 목욕시킬 때 큰 빨간 대야)였단다. 농사지은 것을 팔아서 생활을 해야하니 여자들은 시집올 때 꼭 해와야만 하는 혼수품이었다는데, 엄마는 키우던 개가 낳은 새끼 강아지는 팔았어도 고무 다라이를 이고 나가지는 않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셨다(자랑할게 이런거라니...).
물 좋은 마산은 수출자유지역으로 여러 공장이 지어졌다. 인근 시골에서 상경한 여학생들은 밤에는 학교를 다니고 낮에는 산업역군으로 미싱이나 기계를 돌렸다. 하지만 공장들이 들어서자 땅값이 훌쩍 오르고, 보상금을 두둑히 받자 남자들은 대부분 일을 그만두었다. 그 공장에서는 싼 노동력을 제공했던 어린 여직공들이 인근 도시에서 쏟아져 들어와 사회 시험에도 나왔던 제주도보다 더한 여초지역인 마산에서 여자들은 한량인 남자를 대신해서 일하고 또 일을 해야 했다. 우리 고등학교는 1부 일반, 2부 고등학교 1차 떨어진 아이들의 2차, 3부 공장 다니는 아이들의 산업 고등학교가 있어 한 학년이 모두 25반까지 있었다. 그것도 한 반에 60명이 훌쩍 넘었다. 아버지가 사업에 망하거나 집안에 일이 생기면 친구들은 1부에서 3부로 갔다. 어느날 친한 친구가 갑자기 공장을 가서 3부로 가자 나는 그 친구의 사연을 '별이 빛나는 밤(별밤)'에 보냈다. 공장다니고 밤에 학교 다니느라 피곤한 아이에게 별밤을 들으라고 하다니... 그때 여학생들은 밤이면 이문세의 ‘별밤’ 아니면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 라디오 프로를 들었다. 친구의 사연을 디제이였던 이문세씨가 읽었고, 나는 선물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별밤을 들은 친구의 속마음은 과연 어땠을까?
‘안녕, 같은 반이라 매일 만났는대 이제는 볼 수가 없네...’
이런 내용의 편지를 왜 그냥 전해주지 굳이 라디오에...어처구니가 없지만 그때는 그 친구를 기쁘게 하겠다고 한 일이다. 지금이라도 사과한다. 정말 미안하다, 친구야.
아무튼 우리 중고등학교 때는 ‘공부 안하면 공장 간다’ ‘너 지금 가서 미싱 돌릴래?’ ‘공순이 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3부로 보내줄라니까’ ‘너희는 도시락 들고 다니는 학생이잖아?’ 이런 이야기를 무신경하게 하는 선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공장이 어떤 곳인지, 얼마만큼의 노동 강도가 있는지 그때는 몰랐다(대학에서 전태일 책을 읽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1부와 2부는 모두 야간 자율학습으로, 3부는 6시 이후 수업을 해서10시 반에서 11시 함께 하교를 했으니 같은 노동강도에 피곤함도 같다고 여겼고, 심지어 도시락을 흔들고 다녔다(3부는 회사 급식을 먹고 와서 도시락이 없었다. 남학생들이 지나갈 때 그 앞에서 도시락을 흔드는 행위는 ‘나 3부 아니야, 공순이 아니야’라는 무언의 표시다. 나도 같이 몇 번은 흔들었을텐데... 그 시절의 3부 아이들에게 사과한다. 흔드는 도시락 소리에 아이들 마음까지 심하게 흔들렸텐데... 오죽하면 3부인데 빈 도시락을 들고 다니며 흔드는 아이들까지 생겨났을까? ‘도시락을 흔들면 오히려 3부다’라고 나중에는 흔들지도 않았으니... 쓰고보니 어려서 몰랐다고 하기엔 너무 상처가 되었을 상황이라 울컥한다).
또 아무튼 수출자율지역이 생기고 바닷가의 못쓸 땅을 가진 사람들이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고... 그런 과정으로 남자들은 한량이 되어 평생 술과 여자들 속에 살고, 살림과 생계를 여자들이 도맡아 하기 때문에 저녁 때까지 혼수로 해온 고무다라이를 이고 다녔다. 당연히 아이들은 어두워질 때까지 바깥에서 놀았는데, 밤이 깊어지면 어두운 골목길에서 울려서 더 크게 들리던 싸우는 소리와 밥그릇과 살림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와 때리는 소리와 악을 쓰고 우는 소리... 내가 어렸을 때 행복한 부부는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집은 한옥에 살다 그 집으로 도로가 나서 옆으로 옮겨 삼층을 지었는데 그곳이 동네 아줌마들의 대피소였다. 새벽에 부부싸움 끝에 남편은 칼을 들고 쫓아오고 ‘살려달라’며 울면서 문을 두드리는 아줌마들... 자다가 놀라 뛰어나가 문을 열어준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낮에는 피멍이 들거나 부은 얼굴에 달걀을 굴리면서 신세 한탄을 하는 그녀들의 이야기... 그것을 보고 듣고 자랐으니 TV와 영화, 하이틴로맨스가 정말 ‘그림의 떡’으로 보였다. 연애 소설과 순정만화가 전혀 감정 이입이 안되며 현실성이 없다 느껴지는 것은 너무 어릴 때부터 봐온 피멍든 현실 때문이다. 그러니 연애인 한번, 가수 한번 좋아한적이 없고 책받침 엽서 등 어디에도 연애인 사진 한번 가진적 없고, 싸인 하나 받은적 없다. 잘 차려입고 연출된 그들 또한 하나도 멋있어 보이지 않으니 현실 속에 남자들에게 설랠 이유가 있었을까?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면 나는 엄청 까칠하거나 잔인하고 냉정하게 대했다.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사람을 사귈 마음이 없다’
‘앞으로도 누군가를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누굴 만날 준비가 안되었다’
...
그때 나는 온갖 차가운 말과 냉정한 태도로 ‘이래도 네가 날 좋아할 수 있어? 이래도 사랑한다고?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분위기? 외모?그것이 나를 말해줄 수 있어? 얼만큼? 나도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네가 나를 알 수 있지? 알지도 못하는데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진짜야?...’
늘 누군가 가까이 오면 선을 긋고 넘어오지 못하게 했고, 누군가 넘어오려고 하면 ‘오싹한’ 뭔가를 쏟아내어 상대를 얼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진짜 나의 속 마음은 이랬다.
‘두려워. 누군가를 좋아할까봐. 내가 마음을 주는 것이. 변하는 너를 보게 될까봐. 지옥처럼 살았던 동네 아줌마들과 행복하지 않은 엄마처럼 살게 될까봐. 조금만 천천히 기다릴 수 있어? 도와줄 수 있어?’
하지만 솔직하게 부탁하지 못하고 늘 마음과는 다른 이야기가 튀어 나왔다. 누군가가 다가오면 움찟 놀랐다가 누군가가 떠나면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는...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연민이자 안타까움이었으니 남자에게 설래거나 호감을 갖는 일이 없었을 수밖에.
가장 빨리 결혼할거라는 친구들과 친구 엄마들의 예상을 깨고(왜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나는 친구들 중 가장 늦은 결혼을 했다. 초록은 동색이라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남편에게 동화되었는데, 한번 보고 결혼을 하겠다는 황당한 선언을 한 남편은 내가 어떤 칼을 디밀어도 웃으면서 두 팔을 올리고 기다린 사람이다.
"나를 얼마나 안다고 결혼하자는 이야기를 할 수 있죠?"
"삼십 년을 산다고 다 알 수 있을까요? 다 알아서 좋아하는게 아니라 좋으니까 결혼하고 싶은거죠. 하나씩 살면서 알아가죠.재밌잖아요."
"결혼이 인생에 없는 사람 아니에요? 그렇게 소개 받았는데."
"네, 저도 결혼할 생각이 삼십 년 동안은 없었어요. 아마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삼십 년은 더 없을거에요. 그러면 나이가 육십일텐데 그때는 안 할 것 같아요. 그러니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제게는"
뭐, 이런 식이었다.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내가 실수하는 것을 남편은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실수를 웃으며 자랑하다 보니 상처도 보여주게 되었고... 그래서 알게 되었다. 내가 병이라는 것을. 아직도 많은 부분 자유롭지 못하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몸은 유기적이라 어느 한 곳이 막히면 전체에 문제를 일으킨다. 아마 내가 가진 병이 나의 어느 부분을 막고 흐르지 않게 해서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해졌지만 어릴 때 봤던 아줌마와 엄마의 상처는 고스란히 가슴에 흔적을 남겨 때때로 소용돌이 친다. 옛날보다 좋아졌다지만 결혼생활이 행복한 경우는 아직도 드물게 본다. 좋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잘 들리지 않는다. 내가 배우는 필라테스 선생님은 최근에 헤어지고 몇 달 여행을 떠난다. 내가 여행을 떠나라고 했다. 결혼 할 때 모든 것을 속였고, 직업을 계속 바꾸는 무능력자에 의부증 환자다. 그런데도 가족들에게 멀쩡한척 우리에게 멀쩡한척 했다. 뭔가 어두운 얼굴이 지속되어 물어보다 깜짝 놀랐다.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멀리서는 희극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모두 비극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주인공은 나다.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대본대로 움직이는 그런 배우다. 하지만 이제 생각이 다르다. 인생은 대본대로 악보대로 보다는 악보가 없는 즉흥 연주, 재즈 연주자에 가깝다고나 할까? 경험과 능력이 커지면 더 많은 곡을 연주할 수 있다. 주변의 사람들과 협연도 가능하다. 사람들을 모여들게도 즐겁게도 만들 수 있다. 그동안 살아온 것은 즉흥 연주를 위한 연습이라고나 할까? 누군 좀 더 쉽고 즐겁게 배우고, 누군 좀 더 까다롭고 어려운 선생을 만나 힘들게 배우고, 누군 싫은 선생을 만나 인생이 괴로워서 그 배우는 시간이 끔찍하기도 했으리라. 악기도 피아노, 하모니카, 누구는 섹스폰이다. 우리는 부모나 주변의 어른들에게 인생을 연주하는 법을 배웠을테니, 아마 나는 아직도 연주하지 못하는 어느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부모님에게 배울 나이이기 보다는 주변에서 배우거나 스스로 배울 때다. 그동안 배운 악기와 연주법이 안맞으면 버리고 새로 배워도 된다. 중요한 것은 조금씩 자기 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생긴다. 그러니 삑삑거리는 이상한 소리라도 내어보자. 그 소리없이, 훈련과 연습없이 절로 훌륭한 소리를 낼 수는 없으니. 덜 배웠던 못 배웠던 어렵고 힘들게 배웠던간에 내 인생의 연주자는 나이고 그 소리를 듣는 사람도 나이고 그 소리로 인해 또 배우는 내 아이들이 있다.
오늘도 알 수 없는 인생... 어떤 소리가 날지, 누가 함께 할지, 어떤 장르를 연주할지, 어떤 악기를 새로 잡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제 들을 준비가 되었다. 가끔 ‘삑’ 소리가 나서 귀를 막고 싶은 순간이 오더라도 잠시 멈출 수는 있어도 그 침묵과 소음 또한 아름다운 연주라는 것을,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이 연주를 멈추지는 않을 예정이다. 언젠가는 남들이 들을 수 있는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