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입학하자마자 받은 강렬한 인상이었다. 재정, 인물, 교육, 학술, 네트워크, 서비스, 심지어 음식까지 차고 넘쳤다. 워낙 자원이 방대하다 보니 그 자원을 체계화하는 시스템도 따로 있었다. 나 같은 초보자는 자원을 이용하려면 그 시스템에 접근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처음 몇 달 동안 이 학교가 왕창 쏟아붓는 자원과 시스템에 허덕였다. 어떤 것에는 적응을, 어떤 것에는 무시를 하게 될 무렵,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것에 부닥쳤다. 그것은 시험.
심지어 이 학교에서는 시험도 자원화돼있어서, 시험을 보려고 해도 시스템 접근법부터 알아야 했다. 내가 한국에서 학교 다닐 때처럼 그냥 시험시간에 맞춰 시험장소에 법전 들고 나타나서 손으로 답안을 쓰면 되는 게 아니었다. (아예 답안지를 안줌...)
이미 코로나 이전에도 시험은 100% 온라인으로만 치러졌다. 어떤 시험이든 EXAM 4 라는 시험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보게 되어 있다. 따라서 시험을 보려면 EXAM 4 부터 깔아야 한다.
프로그램을 깔려면 자기 노트북이 있어야겠죠? 입학하기 전에 학교에서 준비물 공지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노트북은 필수" 라는 거였다. 일정 사양 이상되는 노트북이 있어야만 학교 생활이 가능하다고 했다. 다 시험을 보기 위한 것이다.
EXAM 4 는 각 학생이 이번 학기에 어떤 시험을 봐야하는지 꿰뚫고 있어서, 학생이 정해진 시험시간에 프로그램에 접속하면, 해당 시험문제를 열어준다. 학생은 EXAM 4 프로그램 상에서 직접 답안을 입력하고, 시험 시간이 다 되면 답안을 프로그램에 업로드 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인클래스 시험이라도 손으로 쓰는 건 처음부터 안된다. 시험시간에 시험 장소에 등장했더라도 자기 노트북이 없으면 그 학생은 아예 시험을 못 본다.
시험 보는 입장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EXAM 4 를 최신판으로 업데이트하고 자기 Exam ID를 적어두는 것. EXAM 4 프로그램은 매 학기 업데이트되기 때문에, 학기가 바뀔 때마다 새로 다운로드 해야 한다. Exam ID는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학번 외에 따로 주어지는 번호인데, 이것 역시 매 학기 새 번호가 주어진다.
빨간 동그라미 부분에 익명번호인 Exam ID 를 입력하고, 파란 동그라미 부분에 시험 볼 과목을 선택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채점하는 교수님 입장에서는 답안지에서 학생의 이름이나 학번은 볼 수 없고, 오로지 익명번호인 Exam ID만 볼 수 있다.
폰트나 사이즈, 글자 색깔을 선택하고, 타이머가 필요하다면 타이머를 맞춘다. 주어진 시험 시간이 지나더라도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꺼지거나 하진 않는다. 늦게라도 제출은 할 수 있다. 다만 시스템 상 늦은 시간 만큼 학생의 점수가 자동으로 깎인다.
늦게 제출한 학생의 점수가 자동으로 깎이는 것은 교수님의 권한 밖이라서, 아무리 교수님이 학교에다가 부탁을 해도 깎인 점수를 되돌리는 건 매우매우매우 어렵다(고 한다).
다음엔 시험 모드를 선택한다. 인클래스 (In-Class Exam) 라면 클로즈 모드인지, 오픈 모드인지, 오픈+네트워크 모드인지까지 선택하고, 테이크홈 (Takehome Exam) 이라면 그냥 Takehome 만 선택하면 된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인지는 여기에서. koreanlawyer-americanlawyer.tistory.com/17
이렇게 다 시험 모드를 선택했으면 이제 시험문제를 다운 받아 그때부터 EXAM 4 상에 답안을 쓰기 시작하면 된다. 답안은 실시간으로 내 노트북 하드에 저장되고, 워드 카운트가 가능하다. 시험문제 별로 답안을 가르고 싶으면 Answer Divider 기능을 쓰면 된다.
답안지를 다 작성했으면 자기 답안지를 업로드 한다. "Exam Submittal Succesful" 팝업이 뜨는 걸 확인하면 시험은 다 끝난 것이다. 본인이 쓴 답안지를 보관하고 싶다면 방금 업로드한 답안지를 EXAM 4 에서 다운 받으면 된다.
교수님이 보시는 답안지는 어떤 모습일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므로, 석지영 (Jeannie Suk Gersen) 교수님이 2017년 형법 과목 (Criminal Law) 에서 채점하신 답안지를 예시로 보자. 이 분은 하버드 로스쿨에서 유일한 한국계 종신교수님이다.
아래 예시 답안지를 보면, 빨간 박스에 익명 번호인 Exam ID가 나오고, 파란 박스 안에 2017년 가을학기 (F17) 석지영 (Suk Gersen) 교수님의 형법 (Criminal Law) 시험이라는 게 뜬다. 초록색 원 부분은 이 시험 타입이 테이크 홈이라는 걸 보여준다.
맨 아래 쪽에는 워드 카운트가 되어, 교수님이 지정한 글자 수 제한을 위반했는지 안했는지가 나온다. 학생 입장에서 답안을 작성하는 동안에도 내내 워드 카운트가 된다.
아래 답안지를 보니 이 학생은 1번 문제 답안을 다 쓰고 2번 문제로 넘어갔을 때 Answer Divider 를 썼다. Answer Divider 기능은 써도 되고 안써도 그만이다.
이렇게 시험 방식이 복잡하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매 학기 시험 때가 되면 몇 차례에 걸쳐서 교육을 한다. 한 3-4번 정도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온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별도로 2-3 차례 상세한 안내 메일도 보낸다. 왜 시스템에 대한 접근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한지 아시겠죠~
하버드 로스쿨에서는 이미 판데믹 이전부터 100% 온라인으로만 시험을 봐왔기 때문에, 코로나로 인한 판데믹 이후에도 큰 무리 없이 온라인 시험을 치를 수 있었던 것 같다. 판데믹 이후로 인클래스 시험은 모두 테이크홈 시험으로 전환됐다.
다만 기존의 테이크홈 시험처럼 8시간을 준 건 아니고, 원래 인클래스에서 보던 시험시간만큼 (예를 들어 3시간)만 주고, 학생들이 전세계에 퍼져 있어 시차가 있다는 걸 고려해 원데이 테이크홈에 시험 가능시간을 07:30부터 16:30까지가 아니라 0:00시부터 24:00까지로 설정하는 식이었다.
이건 아마도 다른 로스쿨도 마찬가지 일텐데, EXAM 4를 쓰는 로스쿨이 100%는 아니라도 상당히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캐나다와 멕시코에 있는 몇몇 로스쿨에서도 EXAM 4를 쓴다.
온라인으로 시험을 봐온 덕에 학생들은 시험문제와 자기 답안지를 하드에 저장해둘 수 있었다. 그래서 아마 자체적인 족보 사이트에 방대한 족보가 잘 정리되어 사용되는 것일 테다. 이런 족보에 대해서는,
를 보시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