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치타, 여행 중 첫 휴식기간

김강현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⑫ 치타, 여행 중 첫 휴식기간

INTO THE WILD

공원 산책을 마치고 먹을거리를 사들고 숙소에 들어왔다. 큰 도시에 온 것이 오랜만이기도 하고 여행으로 몸이 많이 지쳐 ‘치타’에서 며칠을 더 머무르며 몸을 추스르기로 했다.

러시아의 신호등. 신호등에 시간이 나타나서 언제 파란 불로 바뀌는 지 알 수 있다.

라면을 먹고 다른 일행이 가져온 노트북으로 ‘INTO THE WILD(인투 더 와일드)’라는 영화를 봤다. 무슨 내용인지도 몰랐던 영화인데, 일행이 강력히 추천하기에 딱히 할 것도 없고 술은 먹고 싶지 않아 침대에 둘러앉아 감상했다.

영화 주인공은 부모의 말을 잘 듣는 남자인데,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고 가족과 연락을 끊은 채 여행을 떠난다. 산과 계곡, 바다를 모험하며 여러 사람을 만나고 히치하이킹 등으로 자신의 최종 목적지인 알래스카를 향한다. 그런데 한 겨울, 버려진 버스 안에서 서서히 굶어 죽는다.

평소에 이 영화를 봤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지만, 여행 중에 이 영화를 보고 한 생각은 ‘아, 나도 대충 하다가는 죽겠구나’ 싶었다.

앞으로 갈 길에는 몽골의 대 초원과 사막이 있고, 해발 4000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인 파미르고원도 있다. 지금이야 한여름이라 날씨가 춥지 않고 일행들과 같이 있어서 괜찮지만, 곧 일행들과 떨어지고 고산지대를 바이크로 통과할 생각을 하니 아찔하기만 하다.

게다가 나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생존에 필요한 지식도 없다.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고, 여행을 떠나기 전 주변 친구들이 “너 그러다 일찍 죽는다”라고 할 때 “그럼 어쩔 수 없지 뭐”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그래도 죽고 싶진 않다.

애초 가벼운 내용의 영화가 아닐 거라 짐작했지만, 영화를 보고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제 그렇게 술을 먹었는데도 또 술 생각이 났다. 결국 맥주를 사와 마시고서야 잠이 들었다.

여유로운 하루

다음날 체크아웃 시간 직전에 일어나 씻지도 않고 데스크에 가서 하루치 숙박비를 더 내고 연장했다. 방으로 올라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들었다. 와이파이도 잘 되니 오랜만에 친구들과 연락해 안부를 주고받았다.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참 많다. 별로 잘 한 것도 없이 살았다고 생각해왔는데, 많은 사람들의 걱정과 응원을 받으니 ‘그래도 꽤 잘 살았나보다’ 하는 생각을 한다.

아침 겸 점심은 전날 사온 라면으로 때웠고 하루 종일 누워 핸드폰만 들여다 봤다. 여기가 러시아인지, 인천에 있는 내 집인지 헷갈릴 정도가 됐을 때 문득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꿈꿔온 여행인데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며 하루를 다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씻고 밖으로 나갔다.

공원에서 만난 레닌 동상

날씨가 꽤나 덥다. 그냥 별것 없이 어제 걸었던 공원도 가고, 동네 골목도 돌아다녔다. 여행할 때는 ‘골목을 피하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냥 신경 안 쓰고 돌아다녔다.

치타에서 만난 러시아 정교회. 블록 게임인 '테트리스'에 등장하는 건물 양식이다.

오후에 나와서 조금 돌아다녔더니 벌써 저녁이 됐다. 일행들과 근사해 보이는 카페에서 끼니를 해결하기로 했다.

매번 라면죽으로 때우다보니 상큼한 음식이 먹고 싶어 수제 햄버거와 딸기 스무디를 주문했다. 맛은 아주 훌륭했다. 러시아 음식은 고수와 같은 특유의 향신료 맛이 나서 늘 거부감이 있었는데, 카페에서 주문한 음식들은 자주 먹었던 익숙한 맛이다.

카페에서 먹은 수제 햄버거. 사진찍는 것도 잊고 몇 입 배어물고 나서야 사진을 찍었다.

카페 직원들은 모두 셔츠에 나비넥타이를 하고 큰 쟁반을 들고 서빙하고 있었는데, 러시아의 물가와 비교했을 때 이곳은 꽤 비싼 음식점인 듯했다.

순식간에 음식을 후딱 해 치우고 한참 수다를 떨다 밖으로 나왔다. 숙소 쪽을 향해 걸어가려는데 바로 앞에서 러시아 청년이 우리에게 중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공원에서 이뤄지는 즉석만남

러시아인이 중국어로 말을 걸어오다니. 일행 중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당황하자 그는 능숙한 영어로 중국인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제야 말을 이해한 우리는 ‘한국인이고 바이크로 여행하는 사람들’이라고 소개했다. 그 청년의 이름은 루슬란인데, 중국에서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다가 잠시 집에 와있는 중에 우리가 중국인인줄 알고 반가워 말을 걸었다고 했다.

그는 우리에게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그의 호의적인 모습에 조금 의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를 따라 넓은 공원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눴다. 선선한 밤 날씨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는 친구들을 불러 자신의 집에서 파티를 하자고 했다. 그의 친구가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공원에 앉아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며 같이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다.

루슬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것을 보니, 이 공원은 치타의 젊은이들이 이성을 만나는 장소인 듯했다.

루슬란이 데려 간 한 공원. 이곳에서는 곳곳에서 청년들의 즉석만남이 이뤄지고 있었다.

루슬란은 우리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알려주곤 이성들에게 말을 걸게 했는데, 우리가 어색한 러시아어로 인사하면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 말을 붙이기 더 쉽다고 했다.

그가 알려준 러시아어는 ‘안녕. 이름이 뭐야?’ 정도였는데,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우리는 그 말 한마디만 하고 나서 멀뚱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한 나는 숙소에 들어가자고 일행들에게 말했다.

일행 두 명은 파티를 하고 싶어 해 그 자리에 남고, 나와 다른 일행 한 명은 숙소로 들어갔다. 다시 핸드폰으로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하다 잠이들었다.

“푸틴?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아침에 일어나니 다른 일행들도 숙소에 들어와 있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니, 루슬란의 친구들과 공원에서 만난 사람들이 모여 루슬란 집에서 파티를 했단다. 

술 게임을 하며 놀았다고 하는데, 언어로 하는 게임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몸을 쓰거나 카드를 쓰는 게임을 하며 술을 먹었다고 했다.

둘 다 술을 꽤 많이 먹고 왔는지 아침인데도 술 냄새가 났다. 그들의 요구로 전날 갔던 중국음식집으로 해장을 하러 갔다.

밥을 먹으며 오늘 저녁에 루슬란과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루슬란이 우리에게 그 동네의 음식점들을 소개해준다고 해 그러자고 했다는 것이다.

딱히 할 것도 없고, 현지인이 추천하는 맛집에 가보고 싶기도 했던 나는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한 후 루슬란을 만나러 갔다.

루슬란이 데려간 식당은 야외에 테이블이 넓게 펼쳐져있는 곳이었는데, 우리는 맥주 한 잔씩과 피자 등을 시켰다.

루슬란이 데려 간 음식점에서 맥주와 함께 먹은 피자와 소고기 볶음

그런데 식당 직원이 와서 주먹을 쥐고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편 채 엄지손가락을 입에 대며 ‘슈슈’를 할 거냐고 물어봤다.

루슬란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니, ‘물 담배’를 할 거냐고 물어보는 거란다. 가격이 비싸지 않아 물 담배 하나를 주문했고, 잠시 후 복숭아향이 나는 커다란 물 담배와 개인용 파이프가 나왔다.

식당 한 켠에서 물 담배를 판매하고 있는 직원

루슬란은 중국에서 언어를 전공한다고 했다. 러시아는 임금이 워낙 낮아서 돈을 벌기 어렵다며 한국에 가서 일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

이십대 초반에 중국어와 영어까지 할 수 있는 친구가 자기 나라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게 안쓰러웠다. 임금이 보통 얼마나 되냐고 물었더니, 한화로 한 달에 40만~50만원 수준이란다. 

루슬란에게 조심스럽게 푸틴에 대해 물었다. 러시아에선 작은 시골마을 식당에도 푸틴의 사진이 벽에 걸려있을 만큼 푸틴은 굉장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독재와 탄압 정책을 펼치는 지도자라고도 알려졌기 때문에 현지인들을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루슬란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라고 짧게 말하고 대답을 피했고, 나는 그에게 더 이상 곤란한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 후부터는 가벼운 이야기만이 오갔다. 그는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러시아 서부 도시 ‘소치’에 있는 여자 친구 얘기를 하기도 했고, 우리는 루슬란에게 한국으로 같이 들어가서 샤슬릭 장사를 함께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식당 근처에 있던 '로데오'놀이기구

맥주를 한 잔씩 하고 로데오를 타고 놀았다. 모자를 쓴 친구가 루슬란인데 며칠 전에 싸우다가 손을 다쳤다며 붕대를 감고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술을 마시다 저녁시간이 돼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향했다. 처음 온 장소여서 숙소까지 가는 길을 알려주겠다며 루슬란이 동행했는데, 도중에 어떤 젊은 러시아인이 다가와 담배를 달라고 했다.

우리는 그냥 없다고 하고 지나가려하는데, 루슬란은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했는지 그를 강하게 밀치며 화를 냈다.

또 다시 나타난 의리의 라이더 형제들

상대도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이내 서로 욕을 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더니 멱살을 잡고 싸우기 직전 상황까지 갔다. 우리에게 담배를 요구한 남자는 근처에 있던 친구까지 불러와 루슬란을 공격하려했다. 우리는 그들을 떼어놓고 말리기 시작했다.

그 때 한 무리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치타에 온 첫날 함께 파티를 했던 라이더들이었다.

그들 중 덩치가 아주 큰 한 라이더가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형제들에게 무슨 짓이냐’고 으름장을 놓고 상황을 정리했다. 우리는 루슬란이 우리를 도와주다가 싸우게 됐다고 말했고, 그들은 루슬란의 어깨를 툭툭 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 옆에 있던 길가에 작은 공원 같은 곳이 라이더들이 모이는 곳이라 했다. 각자 바이크를 타고 나와 모여 있다가 근처에서 싸움이 나자 구경하러온 것이었다.

생일파티 이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친구들을 다시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아쉽게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친구들은 없어서 루슬란이 통역해줬는데, 치타 젊은이들 사이에서 우리가 꽤나 유명한 모양이었다. 파티를 함께하지 않았던 라이더들도 ‘한국에서 온 라이더들이다’라고 소개하자 우리를 알고 있다며 반갑다고 인사했다.

라이더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있는 올드카. 1960년대 차라고 하는데 차 주인이 어렵게 구했다며 자랑했다. 그도 라이더여서 스티커를 차 뒷편에 붙이고 있었다.

이대로 얘기를 하고 있다가는 또 파티에 끌려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을 만난 게 반갑기는 하지만 낮부터 술을 먹어 피곤했던 우리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숙소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익숙함에 속아 여행을 잊지 말자

치타에서 3일 째 밤이다. 치타의 라이더들과 루슬란, 그의 친구들까지 많은 사람을 만나 그들의 문화를 보고 경험하기도 했다. 이동하지 않고 안정된 숙소에 있다보니 몸이 아주 편했다. 하지만 계속 이러다가는 이 편안함에 익숙해지고 이곳에 정이 들어 계속 여행하기가 힘들어 질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논의 끝에 다음날 출발하기로 했다. 갑자기 정한 치타에서 마지막 밤이 지나간다. 일행들은 한참 떠들다가 각자 생각에 잠겼다.

이 여행은 시작부터 그랬지만 계획된 것은 없다. 순간순간 그 상황에 맞춰 방향을 결정한다. 그래서 이 여행이 더 박진감 넘친다. 일정을 상세하게 짜놓고 그 지역 유명 관광지나 식당을 가는 것이 아니라, 대충대충 다니다보면 생각하지 못했던 선물을 만난다. 

지금까지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도 그렇고, 캠핑했던 장소들도 전혀 계획에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식당에 가기보다는 그냥 괜찮아 보이는 곳을 찍어 들어가서 그 나라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주문해 먹었다.

때론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고 정보를 잘 알지 못해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냥 발길 가는대로 한량처럼 여행하는 게 마음이 훨씬 가볍다. 계획대로 움직이는 건 과제를 하듯 따분할 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는데,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여행도 지금까지처럼 별 계획이 없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공기 속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다시 여행을 시작하기 전날로 돌아간 기분이다. 내일 마주할 두려움과 설렘을 품고 서둘러 잠을 청했다.

자투리 여행정보 12 - 러시아의 ‘물 담배’

물 담배. 안에 있는 희석액을 증류시켜 파이프를 통해 마신다. (사진출처ㆍpixabay)

물 담배(영어로 hookah)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구할 수 있고, 불법도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렵다. 일반 담배보다 내뿜기는 연기의 양이 엄청나게 많다. 

‘시샤’라는 이름의 향이 나는 담뱃잎을 증류시켜 피우는 것인데, 페르시아에서 발명됐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정확한 역사는 밝혀지지 않은 것 같다.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등에서는 주먹을 쥐고 엄지와 새끼 손가락만 편 후 엄지손가락에 입을 대고 ‘슈슈’라고 표현했는데, 아마 담뱃잎의 이름인 ‘시샤’의 러시아식 발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무래도 담배니 몸에 좋지는 않지만, 사과나 복숭아와 같은 과일 향이 나서 일반 담배보다 역하지 않다. 러시아의 술집 등에선 대부분 이 물 담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술집 직원이 아니라 술집과는 독립된 사업자로, 공생관계이거나 동업하는 사이가 많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