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⑧ 형제라고 불러줘서 고마워
물바다가 된 텐트
이상한 기분에 잠이 깼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돌려 텐트 안을 둘러보니 어둠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새벽이다. 그리고 캠핑매트까지 물이 찰랑거리고 있다. 술에 취하기도 했고 자기 전에도 축축했던 터라 신경도 못 쓰고 잤나보다. 텐트 안은 이미 물로 흥건하다. 손으로 물을 슥 밀어내면 잔잔하게 일렁거릴 정도다.
동시에 잠에서 깬 일행과 텐트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비는 거의 그쳤다. 비에 젖은 흙냄새와 푸른색의 세상은 색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크게 숨을 들이 마시며 조용한 새벽을 느낀다.
텐트 안에 있는 물건들을 밖으로 빼내고 텐트를 뒤집어 물기를 탈탈 털어냈다. 어느 정도 털어낸 뒤 옷으로 대충 물기를 닦은 후 바닥에 펼쳐놓고, 물티슈를 꺼내 몸을 닦았다. 물을 함부로 쓸 수 없으니 물티슈가 제격이다. 물티슈 세장 정도면 온몸이 개운할 정도로 닦을 수 있는 수준이 됐다.
그래도 양치질은 했다. 물을 최소로 쓰기 위해 양치질을 한 후 입에 있는 치약을 침과 섞어 한참을 뱉어낸 후 물을 아주 조금 머금고 입을 헹궈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준비한답시고 연습한 양치질 방법이었는데, 꽤 효과가 있다. 종이컵 반 컵도 안 되는 물로 양치를 끝냈다.
베드버그에 물린 자국을 닦으니 또 간지럽다. ‘긁지 말아야지’ 하며 눈을 꾹 감고 참아가며 아침 먹을 준비를 했다. 버너와 코펠을 꺼내 불을 붙이고 물을 끓였다. 밥을 먹기 전 따뜻한 물을 컵에 따라 마셨다. 따뜻한 물을 마시니 비에 잔뜩 젖어 오들오들 떨리던 몸이 어느정도 진정된다. 몸이 진정되고 나서 끓는 물에 쌀을 넣어 또 라면죽을 끓였다.
매일 먹는 라면죽이 질리기 시작했지만, 돈이 없고 마땅히 사먹을 것도 없어서 계속 이것만 먹는다. 그래도 매번 맛있다. 한국에 있을 때처럼 배불리 먹고 싶은 것을 맘껏 먹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 무엇을 먹어도 맛있게 싹싹 비운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옛말은 역시 틀린 말이 아니었구나, 생각하며 라면죽을 싹 다 비우고 출발 준비를 했다.
촉촉한 아침
붉은 해가 어느덧 푸른 새벽을 몰아내고 있는 아침, 잔뜩 젖어있는 짐을 그대로 배낭에 욱여넣었다. 땅이 다 젖어있어서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려면 한나절은 더 있어야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축축한 몸으로 쌀쌀한 아침공기를 가르며 출발했다. 여느 때와는 다른 기분이다. 정면의 해는 땅에 걸쳐 밝게 빛나지만, 뒤를 보면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다. 안개인지 이슬인지 수분을 잔뜩 머금은 공기 속으로 빠르게 달려 들어갔다.
새벽 기운을 더 진하게 느끼고 싶어서 음악도 듣지 않고 바이크의 잔잔한 울림소리 속에서 한참을 달렸다. 그러다 중간에 멈춰 쉬고 다시 달리기를 반복하다가 넓은 공터가 나와 챙겨 둔 빵을 먹었다.
이제 마켓에 들려야할 때다. 사놓은 식량이 다 떨어졌다. 도시가 나오기까지는 한참 남아서 가는 길에 주유소에 딸린 편의점이 있길 바라며 길을 나섰는데, 잠시 후 그 바람이 이뤄졌다.
일단 기름을 가득 넣고 콜라와 초코바를 샀다. 시원한 콜라를 한 모금 마시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다. 콜라가 이렇게 시원하고 맛있는 음료였다니. 평소에는 잘 마시지도 않는 콜라를 꿀꺽꿀꺽 그 자리에서 다 마셔버리고 초코바를 꺼내 물었다.
우연히 만난 러시아 라이더들
그늘에 앉아 초코바를 먹고 있는데 저 멀리서 바이크가 몇 대 들어온다. 러시아 라이더들은 모두 우리를 반겨줬기에 벌떡 일어나 그들을 만나러 갔다. 역시 웃으며 우리를 반갑게 맞아줬다. 그 일행 중에 알렉산더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는 자동차와 바이크 엔지니어이자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다. 자신을 ‘샤샤’라고 불러달라고 말한 그는 ‘잔나’라는 곳에서 죽은 라이더의 추모제를 하러가는 길이라고 했다.
2008년 한 러시아 라이더가 그 지역(=잔나) 갱단에게 총살당했는데, 라이더들이 그곳에 추모비를 세우고 매해 추모식을 한단다. 이곳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모스크바에서도 라이더가 오고, 심지어 우크라이나나 뉴욕 등 외국에서도 라이더 수십 명이 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온단다. 샤샤는 그 추모제에 우리를 초대했다. 러시아 라이더들의 의리에 감탄한 우리는 그의 초대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를 따라 ‘잔나’라는 도시로 향했다. 도시에 들어가기 전, 길가에 라이더클럽들의 스티커가 잔뜩 붙어있는 표지판이 나왔고 그는 우리를 숲으로 안내했다. 오프로드를 지나 언덕 위로 올라가자 텐트와 바이크, 자동차가 모여 있다. 얼핏 봐도 삼사십 명은 돼 보인다.
샤샤는 그들에게 우리를 소개했고, 우리는 “까레이 모또찌끌 뚜리스트”라고 소개했다. 우리의 인사말이 끝나자 그들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우리에게 다가와 “브라더”라고 부르며 어깨동무를 하고 포옹하는 등 격하게 환영해준다.
인사가 끝난 뒤 샤샤는 우리를 조금 떨어진 곳으로 안내했다. 총살당했다는 러시아 라이더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무덤 앞에서 짧은 묵념을 하며 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었다. 샤샤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 바이크를 타고 있는 이상 하늘에 있는 이 친구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추모가 끝나고 시작 된 파티
다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보니 파티가 열리고 있다. 추모식이라 해서 분위기가 엄숙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각자 자신의 라이더클럽 깃발을 건 천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고 있다. 옆에 있는 자동차에선 음악소리도 크게 나오고 있다.
나는 우선 바이크를 세워두고 텐트를 쳤다. 바이크에 있던 짐을 대충 텐트 안에 넣어두고 샤샤의 안내를 받아 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돈도 먹을 음식도 없는 나에게 그들은 푸짐한 음식과 술을 내줬다. 샤샤에게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하자 “모든 라이더는 형제다. 러시아인이든, 중국인이든,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친구가 주는 술을 받으라”며 집에서 직접 담갔다는 붉은 색 보드카를 내 잔에 가득 따라줬다.
다른 러시아 라이더들은 천막 밖에서 큰 솥에 끓이고 있던 소고기가 들어간 마카로니와 연유를 듬뿍 넣은 홍차와 빵을 가져다줬다.
그 따뜻함이 지치고 힘들었던 마음을 모두 녹게 했다. 바이크를 탄다는 것만으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만으로, 그들은 나를 형제라 불렀고 진심으로 그렇게 대했다. 그 마음이 정말 고마워 울컥할 정도였고, 그들을 무섭게 생각했던 내가 바보 같았다는 생각도 했다.
샤샤의 통역으로 그들과 이야기하며 술을 마셨다. 그들이 직접 담갔다는 술은 평소 사먹은 알코올 40%의 보드카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독했지만, 취하는지도 모르고 술잔을 비웠다.
그러던 중 한 명이 나에게 ‘사우스 코리안이냐, 노스 코리안이냐’고 물었다. 대수롭지 않게 ‘사우스 코리안’이라고 답했는데, 잔뜩 취해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러시아 경찰이라는 친구가 검지를 수직으로 세우더니 ‘까레이 아진(=하나)’이라고 말했다.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남과 북이 한민족이라는 생각은 이전부터 했고, 통일을 바랐기에 바이크에 한반도기를 걸고 이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처럼 노스와 사우스를 구분해 대답했는데, 이 멀리서 만난 러시아 친구는 남북이 하나라고 말하다니. 그 말에 고마움과 함께 부끄러움을 느꼈다. 샤샤가 준 보드카를 자작해 단숨에 마셨다.
그게 기억의 끝이다. 중간에 나보다 더 취한 일행을 부축해 텐트로 들어왔다 다시 나갔고, 그 일행이 토하기 위해 텐트 지퍼를 여는 소리를 잠깐 들었던 것 같은데….
또, 물바다가 된 텐트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 물바다에서 자고 있었다. 지난밤부터 이슬비가 내린다 싶더니, 비가 제법 많이 내리고 있었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같이 자던 일행을 깨워 전날 술을 마시던 천막으로 피신했다. 이미 몇몇 러시아 라이더가 천막 안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에게 뜨거운 물을 받아 전날 사뒀던 컵라면으로 해장을 했다. 보드카를 마셔서인지 숙취는 없다. 컵라면을 다 먹고 그들이 준 빵과 소시지도 먹고 있는데, 우리 앞에 ‘율리안’이라는 여성 라이더가 앉았다. 영어를 할 줄 아는 그녀는 우리 여행에 대해 질문했고, 우리는 질문에 대답하며 아침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치자 그녀는 아침인데도 보드카를 한 잔 가득 따라 마시더니 담배를 물고는 우리에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 기사로 얼핏 보긴 했지만 그 내용을 잘 모르고 있던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고, 그녀는 그 진실을 알려주겠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영토분쟁이 한창이던 크림반도 부근에 산다는 그녀는 “생명에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그 지역에 사는 러시아인들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저지르고 있어서 도저히 살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한참 전에 이미 끝난 일인 줄 알았는데, 그곳에 살고 있는 그녀에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위험이었다. 짧은 영어로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이 더 이상 슬프지 않길 바란다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너무 진지했던 게 미안하다고 했고,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보드카를 한 잔 따라 마셨다.
기약할 수 없는 마지막 인사... "형제라고 불러줘서 고마워"
아침식사를 마치고 짐을 챙기기 위해 텐트로 향했다. 젖어있는 짐을 배낭에 대충 넣고 바이크에 올린 후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동여맸다. 이제 그들과 이별할 시간이다. 하룻밤을 같이 보냈을 뿐인데 정이 많이 들었기에 이별은 아쉽기만 하다.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는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처음 만날 때처럼 우르르 몰려나와 우리에게 인사하며 우리 여행이 안전하길 빌어줬다. 그들도 나처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과 슬픔이 가득한 표정이다.
눈시울이 붉어진 나는 핸드폰을 꺼내 정확하지도 않은 번역기를 돌려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형제들에게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넸다.
“친구라고 말해줘서, 형제라고 말해줘서 고마워. 내가 어디에 있든 너희를 잊지 않을 거야”
자투리 여행정보 08 - 크림반도 분쟁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 최남단 흑해에 있는 반도로, 자치공화국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크림반도는 1921년 소비에트연방(소련)에 편입돼 자치공화국이 됐고, 1991년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고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뒤에 우크라이나에 속한 자치공화국으로 남았다.
부동항을 갖춘 크림반도는 지중해와 유럽으로 진출하는 해상 통로가 된다는 전략적 중요성으로 소련 해체이후에 러시아와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계속 됐다.
1990년대부터 계속된 분쟁은 2014년에 절정을 이뤘는데, 친 러시아 성향의 우크라이나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2014년 2월 국민들에게 탄핵되고, 러시아 계 인구가 절반이 넘는 크림반도에서는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커졌다.
이에 러시아는 크림반도 내 러시아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병해 공항 등 주요 시설을 점거했고, 같은 해 3월 3일 사실상 크림반도 전역을 장악했다.
3월 16일 러시아와 합병을 위한 주민투표가 실시돼 가결됐으며, 3월 21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합병문서에 최종 서명함으로써 크림반도 전역은 러시아의 일부가 됐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크림반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고, 미국과 유럽연합 등 국제사회에서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