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현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오토바이 한 대로 수많은 도시와 수많은 나라를 달렸던 282일, 1만 8000km의 이야기.
잠시 한눈을 팔기에도 버거운 세상에서 살아가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대부분의 삶은 딱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힘들고, 그래서 다른 것들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숨만 쉬며 살아가는 데도 많은 돈이 들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숨 쉬는 시간 빼고 일을 해야 하는 과노동 사회에서 여행은 누군가에게 꿈이자 낙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 지쳐있던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위한 긴 여행을 다녀왔다. 남미 대륙을 여행했던 20세기의 체 게바라처럼 바이크에 몸을 맡기고 유라시아 대륙을 여행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말과 낙타가 뛰어다니는 초원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에서, 눈이 잔뜩 쌓인 산 위에서 수도 없이 자신을 마주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찾고자 노력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해 몽골과 중앙아시아, 유럽을 거쳐 다시 중앙아시아까지, 1만 8000km의 거리를 282일 동안 바이크 한 대로 누볐던 내 무모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⑨ 멈춰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안전한 숙소를 찾아라
한 라이더의 추모제를 함께한 형제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다음 도시로 출발한다. 숙취가 심하진 않았지만 술을 잔뜩 먹은 데다, 이틀 연속 빗속에서 캠핑을 했더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다.
다행히 GPS(위성항법장치)를 보니 멀지 않은 곳에 ‘모고차’라는 도시가 있다. 거리는 약 200km 이내. 일찍 일어난 덕에 열심히 달리면 오후쯤에는 도착할 것 같다.
안 그래도 힘든데, 비까지 내리니 몸이 축 처진다. 운전하는 게 너무 힘들어 조금 이동하다 쉬기를 반복한다. 비가 그쳤지만 우비를 벗으니 옷이 다 젖어있어서 너무 춥다. 우비를 다시 입고 모고차로 향한다.
이정표가 많이 나타나고 도시가 가까워지자 들개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전날 ‘잔나’에서 만난 친구들이 위험지역이라고 말했던 모고차. 큰 개들이 떼를 지어 돌아다니고, 바이크 위에 있는 나에게 사납게 짖으며 달려들기까지 한다.
원래 동물을 무척 좋아하지만 이 들개들은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와 내 다리를 공격하려하고, 심지어 부츠 뒤꿈치를 물기도 한다. 덩치도 어찌나 큰지, 개가 아니라 늑대 떼 같이 느껴져 도망가는 수밖에 없다.
힘들게 달려 겨우 모고차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는 쓰레기 더미가 보이고, 낡은 건물들 사이사이에는 술병과 담배꽁초뿐만 아니라 주사기까지 보인다. 전혀 정돈되지 않은 느낌의 도시. 이 마을에서 가장 안전한 숙소를 잡아야겠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숙소를 찾았다. 주차장도 창고 식 건물을 통째로 쓸 수 있는 데다, 문은 열기도 힘든 튼튼한 철문으로 돼있다. 주인도 친절해 보이고, 숙소 앞에 이불 등 빨래를 널어놓은 것을 보니 베드버그도 없을 것 같다.
따뜻한 샤워
이정도면 괜찮겠다 싶어 당장 들어갔다. 2인실 두 개를 잡고, 잔뜩 젖은 짐을 숙소로 가져와 마를 수 있게 방에 펴두고 빨래거리를 챙겨 샤워장으로 갔다.
조금 뜨거울 정도로 물 온도를 맞추고 샤워기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뜨거운 물이 처음 몸에 닿을 때는 소름이 끼치더니 목과 어깨의 근육이 점차 풀어지는 느낌이다.
아주 오랫동안 샤워를 한 뒤 욕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비누로 옷을 빨았다. 빗물에 젖어서인지, 도로에서 매연을 많이 맞아서인지 구정물이 떨어져 빨래를 하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빨래의 물기를 꽉 짜 창가에 널어두고 침대에 누웠다. 숙소를 일찍 잡았더니 아직도 해가 떠 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오후의 햇볕을 맞으며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었다.
지날 수록 시간을 버는 여행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한국보다 한 시간이 빨랐는데, 어느새 같아지더니 이젠 한 시간이 느리다. 벌써 시차 경계선을 세 번이나 넘었다니. 한 시에 출발해 세 시간을 달렸는데, 여기는 세 시다. 달릴수록 시간을 버는 기분이다.
시간을 번 만큼 잠시 누워서 쉬다가 마켓을 가기 위해 지갑과 단도를 꺼내 숙소를 나왔다. 다행히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켓이 있다. 들어가 먹을 것을 봤더니, 매일 먹던 컵라면과 같은 종류의 봉지라면이 있다. 가격은 컵라면의 절반정도. 바로 구입했다. 면이 얇은 라면이라 봉지를 뜯고 바로 물을 부어 ‘뽀글이’를 해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과자와 맥주 등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아직 저녁이 아닌데 라면을 먹고 자리에 누워 음악을 들었다. 배는 부르고, 포근한 이불 속에 있으니 잠이 솔솔 쏟아진다. 핸드폰 속 사진을 보며 행복했던 추억들을 떠올리다가 어느새 잠들었다.
다음날 일어나니 벌써 점심 무렵이다. 중간에 물을 마시기 위해 깼던 것을 빼면 14시간 정도를 내리 잠만 잤다.
바이크를 타는 것이 걷는 것보다 칼로리 소모량이 많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신경을 집중해야하는 것은 물론, 진동과 바람을 맞으며 하루 종일 달리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이틀간 빗속에서 한 캠핑으로 지쳤던 몸인지라, 잠을 더 푹 잘 수 있었던 것 같다.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개운하다. 봉지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뽀글이를 해먹고 간단하게 샤워를 한 후 다 마른 짐들을 배낭에 넣고 길을 나선다. 날씨가 정말 좋다. 바이크를 타지 않으면 약간 덥지만, 달리면서 바람을 가르면 딱 좋은 날씨다.
기름이 떨어지다
길은 여전히 군데군데 포트홀이 있어 위험하지만 컨디션이 좋아져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신나는 노래를 들으며 한참을 달렸다. 점차 오르막길이 시작되더니 어느새 꼬불꼬불한 산길에 들어선다.
도로는 포장돼있지만 마치 강원도 대관령 길 같은 꼬불꼬불한 산길이 이어진다. 날씨도 쌀쌀해진다. 잠시 멈춰 옷을 입고 다시 달리는데 일행 중 한 명이 갑자기 멈췄다.
기름이 다 떨어진 것이다. 도시에서 제대로 주유하지 못하고 왔기 때문이다. 내 비상 연료통에도 기름이 많지 않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남은 기름을 내 바이크에 다 몰아넣고 주유소를 찾기로 했다.
기름이 다 떨어진 사람과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은 기다리기로 하고, 나와 다른 한 명이 주유소를 찾았는데 다행히 십분 쯤 달리자 주유소가 나왔다. 바이크에 기름을 가득 넣고 예비 기름통을 꽉 채워 일행들에게 돌아갔다.
같이 있으니 금방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는데, 혼자 있다가 기름이 다 떨어지면 큰일이다. 준비를 더 철저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산을 빠져 나왔다.
다시 여유를 찾고 음악을 들으며 달리고 있는데, 짧은 다리가 나오더니 아래로 강이 펼쳐져 있다. 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강을 이룬 듯하다. 곧바로 바이크를 세우고 강가를 살폈다. 자갈밭이 넓게 펼쳐져있고, 강으로 내려가는 길도 있다. 출발하고 100킬로미터도 달리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캠핑하기로 했다.
샤슬릭 도전
두 명씩 나눠 캠핑을 준비하는 팀과 장을 보러 가는 팀을 만들었다. 나와 한 명은 텐트를 친 뒤 땔감을 구하고, 다른 두 명은 마켓에 가서 냉동고기와 라면, 술을 사오기로 했다.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러시아 가족이 불을 피워 러시아 전통 음식인 샤슬릭(숯불 꼬치구이)을 먹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따라해 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적당한 땔감을 구하기가 어렵다. 강가엔 땔감으로 쓸 만한 나무가 많지 않다. 게다가 수분을 잔뜩 머금고 있어 불을 붙이기도 어렵다. 입으로 바람을 불며 한참을 노력했지만 계속 실패했고, 결국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장작이 숯이 될 때까지 고기를 썰어 강가에서 주워온 나무꼬챙이에 끼웠다. 불이 조금 죽자, 그 위에 돌로 지지대를 만들어 고기를 끼운 꼬챙이를 올렸는데 숯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인지 연기만 계속 나고 고기가 익을 생각을 안 한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하고 코펠로 밥을 했다. 라면죽에 너무 질렸던 탓에 제대로 된 밥을 먹겠다고 도전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고기는 익지 않고, 밥도 바닥이 다 타버렸다. 결국 위쪽 밥만 살살 걷어낸 뒤 물을 넣어 누룽지탕을 끓이고, 고기는 꼬치에서 빼 코펠에 넣고 볶았다.
실망이 컸지만, 막상 음식을 먹어보니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누룽지탕은 고소하고 개운했고, 코펠에 볶은 고기는 연기를 한참동안 쐐서인지 훈제 향이 난다. 조금 심심한 간을 맞추기 위해 라면스프에 찍어 먹으니 더 맛있다.
모두 감탄하며 음식을 비웠다. 잠시 쉬다가 나뭇잎을 주워 강에서 설거지를 하고 자갈밭에 누웠다. 햇살이 너무 눈부셔 모자로 얼굴을 덮고 잠시 쉬다가 강물에 몸을 담그기로 했다.
날씨는 꽤 더웠지만 강물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도로가 훤히 보이는 다리 아래에서 발가벗고 머리에 샴푸를 바른 후 물속으로 들어가 씻었다. 물이 너무 차가워 물장구를 치고 놀 수는 없다. 최대한 빠르게 씻고 나와 물기를 닦았다.
멈춰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햇볕을 받아 따뜻해진 자갈 위에 누워있으니 해가 지며 하늘이 붉은 색으로 물든다. 노을을 보며 술을 마셨다. 이동거리는 이틀 동안 달린 것을 합쳐도 하루치도 채 되지 않지만, 며칠 동안 정신없이 달리다 여유를 찾은 기분이다.
처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랬던 거처럼 돌멩이 하나하나에 눈을 맞춘다. 주변에서 캠핑하던 러시아 가족은 진즉 떠났고, 우리만 남아 아주 조용하다. 너무 캄캄해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들 때까지 앉아 있다가 텐트에 들어와 잘 준비를 한다.
목적지를 향해 무조건 빨리 달리기만 하는 게 여행은 아니다. 적당한 휴식이 있어야 더 즐거울 수 있다. 많이 멈춰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여행은 나에게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한다. 새롭지 않은 것들일지라도 마음에 와 닿는 크기가 다르다.
보름도 채 되지 않아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데, 앞으로 어떤 여행을 할지 기대된다.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이 여행의 소중함을 느끼며 풀벌레 소리와 조용히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자투리 여행정보 09 - 러시아의 주유소
여행을 준비하며 가장 걱정한 것 중 하나는 주유였다. 기름이 떨어지면 이동이 불가능하고, 인적이 없는 곳에서 멈추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는 워낙 땅이 넓은 나라여서 마을과 마을 사이도 아주 멀다. 인터넷에서 ‘러시아 주유소’를 검색해보고 러시아 여행 후기를 보며 대충 파악했지만,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5리터짜리 비상 연료통 두 개를 늘 챙겨 다녔다.
비상 연료통을 가지고 다니면 문제는 없었다. 주유소가 많지는 않지만, 큰 도시를 잇는 길이어서 연료가 모두 바닥나기 전에 찾을 수 있었다. 그 중에는 휴게소 역할을 하는 곳도, 편의점처럼 물건을 팔거나 식당이 딸린 곳도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늘 비상 연료통을 가지고 다닐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