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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야매 Jan 17. 2020

여의도 이야기


산책하기 좋은 날씨다. 이번 여름은 걷기에 너무 덥고 습했다. 태풍이 지나간 덕인지 선선한 바람이 분다. 여의도로 밀린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집 앞에도 공원이 있지만 요새는 경전철을 짓는다고 부산해 발이 잘 가지 않는다. 겸사겸사 냉면부터 한 그릇 할 생각에 여의도로 향했다.*


나는 냉면을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여의도 정인면옥에서 내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메밀로 만든 면은 도톰해서 씹는 재미가 있고, 육향이 적당히 배어있는 육수는 맑고 가벼워서 들이키기 좋다. 집에서 거리도 멀지 않아 냉면이 먹고 싶을 때면 여의도를 종종 찾는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는데도 냉면집에 사람이 많았다. 나는 물냉면을 한 그릇 시켰다. 매장은 넓고 깔끔하다. 최근에 지어 그렇다. 정인면옥은 본래 광명 출신이다. 광명에 있는 본점은 여의도 매장과 달리 작고 허름하다. 열댓 명 들어가면 가득 차는 가게가 매니아들의 입소문을 타고 여의도에 진출했다. 골목 냉면집이 이뤄낸 대형성공이다.



성공은 논쟁을 불러왔다. 몇몇 매니아들은 여의도 정인면옥의 오리지널리티를 문제 삼는다. 본점과 맛이 다르다는 것이다. 큰 매장으로 확장하면서 맛과 세세한 부분에 차이가 생겼다. 본점을 다니던 매니아들은 이를 탐탁치 않아 한다. 이름만 같은 이곳을 더 이상 정인면옥이라 부를 수 없다고 했다.


나도 호기심에 광명 정인면옥을 찾은 적이 있다. 냉면의 생김새부터 차이가 있었다. 고춧가루와 파가 올라가고 육수 색이 탁하다. 면은 비슷하지만 육수 맛이 조금 다르다. 광명의 냉면이 진한 육향으로 맛이 더 묵직하고 강하다. 여의도의 것처럼 경쾌하게 들이킬 순 없지만 대신 긴 여운이 있다.


나는 냉면을 받아 육수부터 들이키며 정인면옥의 오리지널리티에 대해 생각했다. 음식은 환경에 맞춰 변화를 거듭할 수 밖에 없다. 가용한 재료를 가용한 방식으로 조리한다. 재료와 방식은 상황에 맞게 변한다. 어느 전통 깊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태초의 모습 그대로인 것은 없다. 음식은 생명체와 같아서 환경에 적응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아무도 만들지 않고 찾지 않으면 생명이 다한다.


정인면옥의 냉면 또한 같다. 열댓 명을 상대하던 조리 방식으로 수 백명을 상대하기는 어렵다. 정인면옥은 여의도 거대 상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방식을 바꿨다. 맛도 따라 변했다. 묵직함은 가벼움이 됐다. 묵직함을 잃어버린 정인면옥은 더이상 정인면옥이 아니게 된 것일까. 변하지 않는 오리지널리티란 존재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냉면을 먹고는 여의도를 걸었다. 여의도는 원래 공항이었다. 공항 자리를 물려받은 여의도 공원은 활주로의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다. 1971년 철거되기 전까지 서울에 오는 비행기는 이곳으로 착륙했다. 광복 후 비행기를 타고 환국한 임시정부 인사들이 처음 밟은 대한민국의 땅도 여의도였다.


공항이 있기 전 여의도는 쓸모 없는 땅이었다. 모래가 많은데다 여름에는 물에 잠겨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별 수 없는 천민들이 들어가 살았다. 조선시대에 이곳으로 발령 나는 관리들은 스스로 좌천되었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여의도는 금융 센터다. 여전히 농사는 지을 수 없지만 사람들은 여의도에서 일하고 싶어한다. 아무도 여의도를 쓸모 없는 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활주로였던 공원에서는 아이들이 바람개비 달린 쌩쌩이를 타고 논다. 공원 한 켠에는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으로 옮겨 놓은 그 비행기가 전시되어 있다. 이 비행기만이 유일하게 이곳이 한때 공항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뛰어 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공원을 마저 걸었다. 바람을 뚫고 돌아가는 아이들의 바람개비에서 이제는 날지 않는 비행기의 프로펠러가 언뜻 겹쳐 보였다. 여의도의 오리지널리티는 별로 중요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의도는 그때도 지금도 여의도다. 나는 산책을 아쉬움 없이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2019년 9월 경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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