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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야매 Feb 20. 2019

영어하는 한국인의 고통

소살리토의 중년 여성과 언어

미국의 속초, 소살리토

샌프란시스코에서 금문교를 건너 가면 있는 조그만 동네 소살리토에 놀러 갔을 때 일이다. 친구와 한국어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해변 옆 산책로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봐도 백 퍼센트 한국인의 디엔에이를 몸 속 한껏 장착한, 아줌마와 할머니의 경계선 즈음에 있는 중년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아유 코리안?” 구수한 말투에서 나는 그녀의 고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상대의 국적을 내 맘대로 예단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에 나는 조심스레 영어로 대답했다. 그녀는 반갑다는 듯이 한국어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는 걸로 보아 딱히 흥미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 개의 견권(犬權) 이야기를 한참 했던 것 같다. 한국은 아직도 개를 먹느냐는 둥, 그렇게 미개한 사람들이 아직도 있냐는 둥 하는 식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듯하다.


이야기의 내용이 어찌되었건 내가 아직도 그녀의 탈모 진행 중이던 두피 상태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녀에게서 났던 불쾌한 입냄새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언어 구사 방식 때문이다. 관심도 없는 개(와 관련된)소리를 일장 연설하는 그녀의 한국어는 어딘가 이상했다. 남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지만, 그녀의 외양은 분명 경상북도 어딘가 아직 삼일장이 열리는 시골바닥에서 50년은 족히 구르면서 다져온 말빨로 어딜 가도 꿀리지 않을 것 같은 포스를 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한국어 문장들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자꾸 단어와 단어 사이에 영어를 섞어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의 언어 구사능력이 한국어 부족에서 끝났더라면 굳이 그녀 이야기를 지금까지 끌고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영어는 한국어보다도 모자랐다.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것이 답답한지 중간에 영어로 말을 다시 시작했다가 한국어로 되돌아갔다가 결국엔 이도 저도 아닌 채 문장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듣는 사람의 짜증만 불러 일으켰다. 한국어도 애매하고 영어도 애매하고 그야말로 0개 국어를 구사하는 중년 여성이었다. 


소살리토에 다녀온 지 벌써 2달이 지난 오늘 나는 그녀가 문득 생각났다. 점점 내 언어 능력도 애매해지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미국에 온지 어언 반년, 분명 한국어를 쓰는 빈도는 서울에 있을 때 보다 한참 줄었다. 누가 말하기를 언어란 쓰지 않으면 점점 잊혀지는 종류의 것이라고 했다. 아마 어디 인터넷에서 본 것 같다. 이 명제는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해야만 하는 당위를 뒷받침하기 위해 쓰였겠지만, 지금 내 경험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한국어에도 유효한 것 같다. 종종 한국어를 쓸 기회가 생길 때 마다 내 언어 능력이 퇴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자주 쓰던 단어들이 기억이 나지 않고 혀끝에서 맴돈다. 말하는 것 하나 만큼은 자신 있었던 나이기에 이런 상황이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


더욱 문제는 여기에 있다. 하나가 줄면 다른 하나가 느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패자가 있으면 승자가 있는 법이고 잃는 놈이 있으면 따는 놈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내게 문제는, 한국어는 줄었는데 영어가 늘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다. 한국어로 단어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영어로는 나야 응당한 것 아닌가? 어쩐지 둘 다 애매해지는 느낌이 든다. 


비트겐슈타인이 이야기 하기를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라고 했다. 내가 철학자 경구에 진심으로 공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미국인들 사이에 있을 때는 한국어를 쓸 일이 없다 보니 생각도 한국어로 하지 않게 된다. 대신 나도 모르게 영어로 생각을 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이게 영어도 금새 늘고 좋을 줄만 알았다. 배고프고 졸리다 같은 기본적인 생각을 하는 데야 문제 없지만, 내 영어 실력에는 커다란 한계가 있어 고급스런 사고를 영어로 해낼 수가 없다. 한층 더 깊이 들어가 생각하고 내뱉어야 할 이야기를 영어로는 하기 힘들다. 그 논리 구조를 영어로는 구성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업무 미팅이라도 들어가 빠른 템포로 대화를 나누어야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말을 듣고, 이해하고, 사고하고, 결론 내린 후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보통의 경우 나는 이해하고 수준에서 멈출 수 밖에 없다. 마저 결론까지 내린 후 드디어 내 의견이라도 낼라 치면 어느새 타이밍은 지나가 있기 때문이다.


내 언어의 감쇠는 곧 내 세계의 감쇠다. 언어를 잃는 다는 것은 하고픈 말을 할 수 없다는 것 이상의 손해다. 나의 사고는 나의 언어 능력의 경계선에서 멈춘다. 내가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허나 나는 그 역도 성립하리라 믿는다. 내 언어의 성장은 내 세계의 성장이 될 것이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로도 원활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면 내 사고의 경계선은 저 멀리까지 확장되리라. 이제 나는 기로에 서 있다. 소살리토의 개(와 관련된)소리하는 아줌마가 될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세계를 만나느냐는 나의 선택과 노력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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