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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빛 Nov 17. 2023

내 마음 관찰일기

마음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

마음을 관찰하는 것은 재밌다. 대게 명확한 한 가지인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을 뜯어보면 여러 가지 감정과 함께 엉뚱한 견해가 뒤범벅되어 있다. 이것들을 해체할수록 복잡했던 마음이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전환되는 것을 경험한다. 마음이란!


마음은 대게 한 상황으로 전부 들여다보기는 어렵다. 고개들고 나오는 것들은 결국 내 안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성 안에서 살필 때 깨달아지고 이해된다.


요 근래 마음에 큰 돌이 던져졌는데, 바로 ‘불쾌함’과 ‘서운함’이었다. 나는 주로 감정이 마음의 표면으로 드러나는 방식은 ‘분노’다. 분노라는 감정이 고개 든다면, 마음을 주의 깊게 봐야 할 때라는 신호다. 분노라는 감정 안에는 다른 많은 감정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들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고마움’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또한 고마운 일이다.


내게 느껴지는 감정을 나라고 여기지 않고 거리를 두고 바라보려 했다. 그리고 그 감정에 이야기 붙이지 않으려 했다. 내가 던지는 질문은 드는 생각에 기반했으며, 그 과정에서 의도와 다르게 다소 중심을 빗겨나갔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불쾌함


이런 일이 있었다. 일정을 앞두고 준비하고 있는 나와 계속 같은 동선으로 옮겨 다니며 통화하고 있는 상대 모습에 불쾌감을 느꼈다. 정확히는, 겹치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는 스스로의 모습과 전혀 미안한 내색 없는 상대의 모습이 불쾌했다. 도대체 나는 왜 시도 때도 없이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지, 진짜 미안한 게 맞는지, 하는 의문과 함께.


어느 경로로 ’불쾌감‘이라는 감정이 찾아왔는지, 이 감정에는 어떤 마음들이 붙어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뒤로 따라오는 내 마음을 들여다봤다.


전에 몇 번 상대가 나를 불만족스럽게 여기는 것에 대해 어려워하는 스스로를 본 적이 있다. 상대가 나를 만족하든 하지 않든 나의 존재는 변함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만족스러운 존재이고 싶어 하는 욕구다. 만족스러움. 이 얼마나 상대적이며 바람과 같은 마음인가.


- ‘만족스러움’에 대해


‘나는 늘 만족스러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

‘나의 만족스러움의 기준은 무엇인가?’


‘만족스러움’의 기준이 ‘나’로부터 나온다면, ‘나’는 고정된 실체인가? ‘나’를 구성하고 있는 느낌 생각 감정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면, 만족스러운 상태도 계속 변화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만족스러움’이라는 느낌 혹은 감각은 제한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나는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더욱 일반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만족스러움이 찾아왔을 때 고마움을 느끼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지점 앞에 선다.


 

2. 서운함


그 후 바로 다음 날 있었던 일이다. 내가 저녁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을 때, 상대는 방문을 거의 닫은 채로 밥을 먹고 있었다. 그때 내가 드는 감정은 ‘서운함’이었으며, 나를 향한 ‘사랑’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 대한 ‘분노’였다.


분노는 주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좁은 시야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들어올 때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이라 생각한다. (분노는 뚜렷한 몸의 감각을 가지고 찾아온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던지, 입술을 앙 다문다던지 등) 당시 내가 옳다 여겼던 전제는 ‘같이 있을 땐 함께 밥을 먹어야 한다’ > ‘그게 사랑하는 관계다’를 지나, ‘따로 먹고 있는 것을 선택한 상대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에 빠른 속도로 가닿았다.


결국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인가?”라는 분노와 회의가 뒤범벅된 문장이 생성되었다. ‘회의’는 현실을 부정하는 힘이 있기에 다른 세계에 대한 환상을 데리고 온다. ‘다른 누구였다면 다를 텐데’, ‘다른 누구에게도 이랬을까?’, ‘내가 다른 조건에 있었다면 다를 텐데’ 등등.


- ‘나’에서 ‘너’로


그러니까 여기까지의 글을 통해 마음이 얼마나 연관 없는 길로 질주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 (마음이 그렇다) 이쯤에서 정신 차리고 서운함을 느꼈던 지점으로 다시 간다. 생각해 보자. 상대는 그냥 밥을 혼자 먹고 싶지 않았을까? 오늘 나와는 다른 세계 속에서 무수한 사건을 겪으며 지쳤을 수도 있다. 혹은 ‘그냥 별생각 없이’ 혼자 먹는 걸 수도.


여기서 시점이 ‘나’에서 ‘너’에게로 옮겨갔다. 이는 기적 같은 일이다. ‘너’를 살피고 헤아려보는 것은 상대를 향한 ‘연민’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혹시 마음이 힘든 상태는 아닐까?’ 이러한 질문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 주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지점앞에 서게 된다.


- ‘기대’에 대해


조금은 시각을 달리해서,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더 같이 먹고 싶은 내가 먼저 같이 먹을 것을 제안하는 것은 어땠을까? (상황에 대한 눈치를 살피며, 거절이 오는 것을 두려워함으로 제안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제안했을 때엔 거절이 올 수 있음을 함께 떠올리면 좋다. 거절은 나라는 존재를 부정 당하는 게 아니다.)


담백한 것은 ‘묻고 수긍하는 것’이다. 사실 그게 안돼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묻기 전에 원하는 상황이 나에게 원하는 모양과 느낌으로 도달해있기를 원한다. 가능한 한 번에 깔끔하게 말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대’를 지어내며, 그 과정에서 기대에 대한 수혜 대상들을 설정하고 자신을 시혜자로 설정하며, 설정한 그 구조 안에서 실망하고 분노하는지 볼 수 있다.


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없이 양육자에게 모든 것을 의탁한 ‘아기’라면 괜찮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절을 지나 받은 사랑을 나누어야 할 존재로 성장했다. 그러니, ‘기대하는 것을 기대만 하지 않고, 기대하는 것을 스스로 지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필요한 덕목이다.



3. 사랑


앞서 본 것과 같이, 내 경험에 의하면 타인을 향한 사랑의 기본 전제는 ‘나’로 고정된 시점을 ‘너’로 옮기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시점이 달라진 그 세계에는 연민이 흐르고 있으며, 그 연민은 너와 나를 단숨에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것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다.


나는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질문 앞에선 자신이 없다. 그러나 ‘나로 고정된 시점을 계속해서 너로 옮기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선, 그것이 얼마나 큰 노력을 필요로 하는지 알지만 그럼에도 해나갈 것이라 답하고 싶다. 그 노력으로 인해 덕을 보는 이는 너이기도 하지만, 가장 먼저는 ‘나’이기 때문이다.


앞서 느꼈던 불쾌함, 서운함, 분노 그 깊은 곳에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 애정이 담긴 눈을 맞추고 빙그르르 미소 짓는 네 모습 말이다. 그 작은 순간에 복잡한 마음의 실타래가 가볍게 풀리기도 한다.


지금까지 내가 나를 관찰하며 경험했던 사랑은 이렇기에, 다른 이를 만날 때 되도록 눈을 맞추고 밝게 웃으며 인사하려 한다. 지나가는 말이라도 멈춰 서서 대답하려 한다. 이것은 내 마음이 담긴 사랑의 실천이다. 이 사랑의 모습에 반응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이것과는 다른 사랑의 모습을 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저마다의 작은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그 작은 마음 조각들이 모여 서로를 밝혀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작은 마음도, 들여다보고 살피는 것을 놓친다면 쉽게 어두워지곤 한다. 작지만서도 전부이기도 한 이 마음을 계속 관찰해가고 싶다.


밤하늘 보며 조잘조잘 이야기하고 싶은 내 마음도 그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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