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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 성긴 세상을 채우고 간 사람

게이 열전(列傳) 02 - 표트르 차이콥스키

차이콥스키의 아내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러시아 출신의 감독 푸틴의 탄압을 받는 연출가가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안나. 차이콥스키의 아내의 관점에서 바라본 차이콥스키의 이야기였다.

여전히 세상은 참 성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성숙한 시대.. 세상이 아직 차이콥스키를 이야기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남성을 사랑하는 이에게 결혼생활을 요구하는 여성에 대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토니 모리슨의 한 문장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사랑은 절대 사랑하는 사람보다 중요하지 않다...

차이콥스키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차이콥스키의 아내를 더 사랑한 것은 아닌지..


언제가 한 목사님의 부인을 본 적이 있다. 그분은 꿈이 목사 부인이었다고 했다.

목사의 사모가 되어 교회의 신도들을 이끌며 만족해하는 그분의 모습을 보며

참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아내가 아니라, 목사의 아내가 되고팠다는 그 사모의 말은

어쩌면 학생시절부터 교회를 보며 목사를 하느님의 대리자를 동경하고 그것이 결국 이상형이 되고만,

참으로 신앙적인 아이러니가 아닌가..

아이러니인 이유는 여기에 목사님만 있고 사랑의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긴 세상..

차이콥스키의 사랑을 말하기엔, 여전히 지구라는 세상 지구라는 사회는, 덜 성숙한 듯하다.

그러기에 그는 그렇게 차갑게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닐까..

누구나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와 같은 사랑을 할 순 없다.

사랑하는 이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사랑하는 이에 대한 사랑이라면 그런 것이 아닐까.

알코올로 죽어가는 연인을 바라보며 흐르던 그 음악.

천사의 눈동자..

바다로 떠나가는 남자를 보내주던 그랑블루역시도,

그렇게 세상에 자리가 없는 것 같아 떠난이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살기엔 너무 성긴 세상..

https://www.youtube.com/watch?v=QS1MgqJ7B3Y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이건 고아의 음악이란 생각이 들었었다.

연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존재의 출발에 잃어버린 그 공허가 늘 울리는 느낌이었다.

백조의 호수의 메인 테마도 그랬다.

이건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몸에 한 곳이 무너져 내린 사태처럼 느껴졌다.

차이콥스키음악엔 그렇게 고독과 공허와 끝내는 죽음의 흔적이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cNQFB0TDfY


고독한 자화상,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


그 슬픈 그림자는 마치 작곡가의 생애에 걸쳐 참으로 길게도 드리워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모든 음악과 음악 이야기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의 첫 3분 42초다.

화려한 유자왕의 연주여서 더 그랬는지 모르지만,

2악장이 시작되는 20분 40초에서 피아노가 등장하는 24분 22초까지

마치 바이올린과 첼로의 이중주처럼 현악기들만 연주한다.

그 긴 시간 피아니스트는 멍하니 앉아 있는다.

난 이 모습이 차이콥스키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뒤에서 흐르는 음악을 묵묵히 듣고 있는 그 외로운 모습,

그것이 화려한 음악 이면에 그늘진 그의 삶, 그의 시간은 아니었을지..

2악장을 적어가며, 그 고독한 피아노의 모습이 자신의 젊은 시절의 자화상은 아니었는지...

그 빈 공간이 자신의 눈물의 공간이 아니었는지..

23분 23초에 첼로가 들어선다. 이중주가 흐르지만, 피아노는 더 외롭고 선율은 가련했다.

(언젠가 프랑스의 간판 라디오 클래식에서 한밤중 이곡을 전송하며

2악장의 초임 3분 42초를 제외하고 방송한 적이 있었다. 무식하고 무자비한 편성이었다.

언젠가 라디오프랑스는 파시스트라고 한 딸아이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24분 22초 2악장이 시작하고 2분 22초 만에 피아노가 들어선다.

바이올린과 첼로의 선율을 반복하는데..

음..

그저 묵묵히 운명을 받아들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것이 내 삶이다.라고..


https://www.youtube.com/watch?v=Z85ly4in-B4



장례식, 교향곡 6번 비창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장례식을 그려놓은 것 같았다.

3악장에서 '쿵쾅'하며 심포니는 끝나는 듯했고,

많은 경우 여기서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지휘자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단원의 얼굴은 머쓱해진다.

그리고 비참하고 어두운 4악장이 흐른다.


난 그 4악장을 들을 때마다,

마치 장례식을 마친 관이 땅아래로 내려가 있고,

그 관을 내려앉은 관을 차이콥스키가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렇게 자신의 장례식을 그려놓은 것 같았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죽은 누군가를 위한 곡이었다면,

차이콥스키의 비창은 심포니 6번이 아니라 레퀴엠, 진혼곡이 아니었을까.

주인공은 자신인, 자신을 위한 레퀴엠은 아니었을까....


장한나의 공연이 인상적이었다.

시작부터 땀을 뻘뻘 흘리는 지휘자와

먼 북유럽에서 유랑 온 듯 보이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검은 복장에 하얀 양말을 신는 정도의 정신상태라면,

패티 김 선생 공연의 반주 오케스트라만도 못해 보였다.

더구나 패티 김 선생은 발목에 올라온 양말 색이 흰 단원을 발견하곤 검은 양말을 사다가 바꿔 신게 했다.

그러나 지휘자의 열정이 통한 것일까..

음악이 흐를수록,

비탄한 음색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인간미가 느껴졌다.

적어도 내겐 작곡가를 향한 연민처럼 느껴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TUF6puOuvSc


차이콥스키의 음악, 

그의 음악은 무엇을 남겼나..

차이콥스키는 어떤 의미인가...

부재, 냉대, 소외를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놓은 것은 아닐까..

음악이라는 덩어리로...


사람들이,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부재의 고통을 운명의 야속함을, 회한을,

소리로 적어놓고 간 것은 아닐까..

우리는 놀라면 '엄마'를 외친다.

그런 엄마를 잃은 존재의 느낌은,

엄마를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어릴 때 잃을수록 그 그림자는 그의 생애만큼 길고 또 짙어진다.


'동성애? 그건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거지..'

언젠가 한 선생님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는데,

난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사회의 통념을 넘어서서, 남들의 시선은 상관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따라 사랑하는 것,

그것은 전 생애를 바쳐서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르기에,

정말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이들의 사랑이 아닐까..

차이콥스키도 그렇게 사랑했고, 결국 목숨을 요구받았다.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죽을을 요구했던 야만의 시대..

역사적으로 미궁이라고 하지만, 난 그의 죽음을 그렇게 생각한다.

앨런 튜링처럼, 강요된 사회적 죽음이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비루한 권력을 지키려는 기득권들을 보면 정말 구토가 올라온다.


어둠이 두렵고, 

외로움이 싫었지만,

차이콥스키의 그림자만은,

나도 모르게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절하게도 외로운 그의 선율의 그림자가 나를 덮어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 그림자를 만든 차이콥스키의 곁에 잠시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는 성긴 세상을 살다 갔고,

그의 음악이 그 빈틈을 종종 채우며 흐를 때,

그의 음악이 주는 온기를 느끼며, 

나도 거기에 잠시 머문다.

차이콥스키에게 감사를..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 05. 07.- 1893 1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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