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본 세상
"서구사회에서 17세의 아이들은 미디어를 통해 17년 동안 17000번의 죽음을 본다."
전인류가 충격에 빠졌던 9.11 테러 직후 방송대담에서, 철학자 미셀 세르의 말이었다.
실시간으로 테러를 목도하며 충격에 빠진 당시의 대중들에게, 이미 도래했던,
죽음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렇게 죽음은, 그 무게를 잃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만났다.
쿠팡과 골든타임, 살인에 대한 무감각
최근 또다시 쿠팡에서 배송노동자가 과로로 의심되는 이유로 사망했다.
이젠 많은 언론들, 한겨레조차 보도하지 않는다. 검찰이 눈감아주었듯이,
언론도 눈감으며, 광고주인 쿠팡의 눈치를 보는 걸까?
https://www.khan.co.kr/article/202510161623001
쿠팡의 '사악함' 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쿠팡에 대한 시민들의 '무감각'이다.
진보 유튜브 진행자들조차, 쿠팡에 주문했다고,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골든타임'이라는 단어를 '주저 없이' 사용하는 '무감각'처럼.
'쿠팡'에 대한 '무감각'은 '진행형'인 폭력(배달노동자에 대한)에 대한,
무감각이다.
나는 '골든타임'이라는 단어를 무턱대고 쓰는 것에 불편했다.
'세월호 참사'이후 자주 쓰이는 '골든 타임'.
그 골든 타임이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던 시간'임과 동시에,
희생자들이 '고통'속에 죽어간 시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쉽게 입에 올린다.
숨 쉬던 희생자들이 죽어간 그 시간에 대한 일말의 고려가 있다면,
그 '골든타임'이라는 단어를, 여기에, 또 저기에 쉽게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런 참사를 겪었다면, 그 아픈 시간에 대해 '주저'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 아닌가.
문재인 정부조차도 '경제'를 이야기하며 '골든타임'을 운운했다.
그 정부도 세월호의 진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결국 없었던 것 아닐까..
한강 작가를 선정한 이유에 대해 노벨 위원회는,
'죽음과 폭력 등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시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로 풀어냈다.'라고 밝혔다.
그 시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는, 읽다 보면,
아프다.
어떤 부분은 쉬이 읽히지 않는다.
세상이 '죽음'과 '폭력'에 한없이 무감각해서,
소설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힘들 때도 많다.
배달원들이 죽어가며 배달하는데, 아무 감각 없이, 이유 없이 '빠른 배송'을 택하고,
제빵사들이 피를 흘리며 빵을 찍어내도, 아무 감각 없이 그 빵을 베어 먹는다.
아이들이 바닷속에 갇혀 죽어간 그 시간을 이르는 단어를 아무 생각 없이 쓴다.
나의 생각엔, 쿠팡은 죄악이다.
죄악은, 죄를 짓는 악한 행동을 일컫는 말인데, 기사를 검색해 보면
로켓배송의 연료가 된 사람들이라는 뉴스타파의 보도가 뜬다
빠르게 배달하기 위해, 노동자를 연료를 쓰고 있다는 표현이다.
빠르게 배송받고 싶은 소비자의 욕구까지 죄악이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욕구를 수익으로 연결시키서, 그 일을 수행하는 구성원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그리고, 물건을 빠르게 배송받기 위해 주문한 소비자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공범이 되고 만다.
아주 오래전 고속도로엔,
3분 먼저 빨리 가려다가 30년 먼저 간다 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과속을 '경고'하는 문구였다.
세월이 이상하게 흘렀다.
과속을 경고하는 문구가 무색하게,
서로 더 빠르게 가겠다고 한다
사람이 죽든 말든 말이다.
ps
이 글은 써놓고 올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의 주변 사람들도 쿠팡을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쿠팡에 관한 기사를 또다시 보게 되었다.
어떻게 침묵할 수 있는가...
https://v.daum.net/v/20251002154230099
ps 3
나는 쿠팡의 팝업창이 너무 싫다
한겨레마저도 그 팝업창이 시도 때도 없이 뜬다.
그들의 예의 없음이, 팝업창에서 이미 보인다.
https://www.youtube.com/watch?v=iS64D5FzHoc
https://www.youtube.com/watch?v=lDLpDMCvdG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