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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 Mar 07. 2022

군중낙원 : 전쟁과 그 속의 개인들



영화 『군중낙원』


영화 『군중낙원』은 1960~70년대 대만을 배경으로 한다. 대만과 중국이 대립하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군중낙원이라 불리는 금문도 군영 내 공창 '831 부대'의 여러 인물들의 사연을 담았다. 주인공인 ‘파오’는 해룡특전사 수색대대에서 훈련을 받다가 ‘831’이라 불리는 군대 내 공창으로 전입을 오게 되는데, 처음에는 이 환경을 낯설어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환경에 적응하고 부대 내 ‘위안부’ 여성들과 친하게 지낸다. 그중에서도 니니와 특히 교감을 나누며 친밀하게 생활한다. 니니는 남편을 죽이고 수감생활을 줄이기 위해 이곳에 들어온 사연을 가진 여성이다. 이 외에도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장상사와 그가 자주 찾던 ‘위안부’ 지아오, 군내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하고 ‘위안부’ 사사와 함께 탈영한 파오의 친구 화싱 등 다양한 인물의 사연을 보여준다.




『군중낙원』의 시대적 배경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장개석 중심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내전에 돌입한다. 내전이 끝나갈 무렵인 1949년 공산당 지도자 모택동은 중국 본토를 통일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 반면 본토에서 밀려난 장개석과 국민당 정부는 팽호제도와 마조섬, 금문도에 요새를 건설하고 본토 반격에 나선다. 이 결과, 전쟁 재개에 혈안이 된 대만이 본토를 코앞에 두고, 본토 피난민과 대만인들을 대상으로 강제 징집하고 여성 수감자들을 접대부로 이용해 831부대를 만든 것이다.


영화 곳곳, 특히 초반에 시대적 상황이 드러나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놈들은 홀수 날에만 우리를 공격하는 거야.”라고 장 상사가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중국이 대만에게 예고하고 폭탄을 투여하는 모습, ‘장개석은 인민의 적, 모택동은 대만의 구세주’라는 글이 적힌 선전물이 떨어지는 모습, 대형스피커를 통해 체제를 선전하는 방송을 진행하는 장면 등 금문도 포격과 심리전의 모습이 영화 초 파오가 해룡특전사 수색대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와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면에서 종종 등장한다. 장 상사를 통해서는 이산가족의 모습도 보여준다. 장 상사는 엄마가 만들어준 신발이 너무 소중해 차마 신지 못하고 옆구리에만 끼고 다니던 순박한 아이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퇴각하는 국민당군에 끌려 고향을 떠났고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께 효도할 날만 그린다. 이처럼『군중낙원』은 영화에서 주제로 삼고 있는 당시 ‘위안부’ 모습 자체뿐만이 아니라 냉전의 최전선인 중국과 대만의 분단 풍경을 다양한 인물과 사연을 통해 영화 곳곳에 관련 상황을 묘사하였다.




『군중낙원』속 ‘위안부’


『군중낙원』은 ‘위안부’ 문제에 관해 등장인물 간의 대화나 상황을 통해 위안소의 전체적인 시스템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또한 그것에 그치지 않고 시대적 상황과 인물들과 연결시켜 ‘위안부’의 한정적이고 획일화된 하나의 집단의 이미지보다는 그들 개개인의 다양한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우선 영화는 주인공 ‘파오’가 처음 ‘381 부대’에 들어와 관계자에게 일을 배우는 장면을 통해 ‘위안부’의 상황과 운영 시스템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파오가 ‘831 부대’에 들어와 관계자에게 여자가 많다고 이야기하자, 관계자는 ‘10만 명의 군인을 상대’하기엔 부족한 숫자라고 답변한다. 이를 통해 관객에게 당시 ‘위안부’들의 인권, 실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관계자가 ‘파오’에게 해야 할 일을 소개 시켜주는 장면을 통해서도 위안소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명확하게 전달한다.


영화는 이런 일반적인 ‘위안부’의 실상을 전달하고 그들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등장인물 각자가 갖고 있는 다양한 사연도 보여주며 그들이 ‘위안부’라는 하나의 틀 안에만 갖혀 있는 획일화된 사람이 아니라 개별적인 존재로 존재하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다 결국 남편을 살해하고 아들에게 빨리 돌아가기 위해 감형을 받으러 ‘831 부대’에 온 ‘니니’, ‘831 부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소를 이용해 군인들을 상대하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지아오’, 그 외에도 위안소 내에서 서로 싸우기도, 응원하기도 하는 다양한 ‘위안부’ 여성들의 모습도 등장시킨다. 이들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갖고 있던 ‘위안부’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아들이 있고, 군인에게 잘 보여 각종 보석을 얻어내려 하고, 서로 싸우는 이들의 모습은 그동안 그동안 ‘귀향’ 같은 영화 내 에서 보았던 획일화된 ‘위안부’이미지와는 달랐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욱 현실적으로 여겨졌으며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각자의 사연을 갖고 있는, 실제로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한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군대 가혹행위를 버티지 못하고 사사와 함께 탈영한 화싱은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이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은 그런 사람들이다. 장 상사도, 지아오도, 주인공인 파오도, 니니도 그렇다. 영화에는 다양한 인물과 그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장 상사와 지아오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지아오는 영화 내내 군인들에게 웃음을 보이고 그들에게 다양한 보석을 받는다. 장 상사는 그런 지아오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어 결혼을 결심하지만, 지아오는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지아오는 파오가 자신에게 “어떻게 장 상사님을 갖고 놀 수 있냐”는 말에 “난 사랑받을 자격도 없어? 장상사가 나를 정말 사랑한다고? 증명해봐. 나랑 결혼하겠단 놈 한 둘인 줄 알아? 누가 창녀랑 결혼하겠다고, 너라면 나랑 결혼하겠어?” 라고 답변하며 분노한다. 장 상사가 자신에게 ‘진심’이 아니었냐고 묻자 ‘내가 장 상사와 결혼하면 장 상사를 볼 때마다 지금의 순간이 생각날 것’이라 답하기도 한다.


영화 속 ‘831 부대’ 내 모습과 분위기는 가끔씩 묘하게 아련하고 로맨틱한 느낌이 든다. 화면의 색감과 파오와 니니의 관계, 니니가 부르는 노래가 그런 효과를 발생시킨다. 게다가 파오와 니니, 장 상사와 지아오의 관계를 다룰 때 군인들 각자가 가진 사연은 관객으로 하여금 파오와 장 상사로 군인을 대표해 그들의 행위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는 자칫하면 군인들이 위안소에서 했던 모든 행위를 미화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군인들이 ‘위안부’를 폭행하고, 사람 취급하지 않는 장면이나 대사들도 등장하긴 했지만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공들의 사연 때문에 그곳을 이용한 군인들의 행동이 미화되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단 우려가 들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장 상사도 시대가 만들어낸 인물이고 상처받은 사람이다. 장 상사 역시 원치 않게 끌려와 어머니와 헤어져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 상사를 비롯한 많은 군인들이 ‘시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죄가 없는 사람들인 것은 아니다. 그들의 상처는 그들의 것이고 그들이 상처 받은 것을 위안소에 있던 여성들이 해결해줄 이유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 쯤, ‘위안부’들이 군인을 상대하는 장면을 버즈아이로 담아 그녀들이 당시 어떤 표정과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 지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이 장면은 니니가 부르는 OST와 함께 나왔는데 그 순간 그녀들은 초점이 없이 누워 있기도, 너무 일상적이라 오히려 웃으며 혼자 장난을 치기도 한다. 영화 중간 지아오가 “장군 잡역부 다 똑같이 날 짐승 같이 취급해.”라고 이야기 한 장면이 있었다. 그 전까지는 웃는 얼굴만 하고 파오에게 성적으로 장난을 치기도 했던 그녀의 진심과 고통이 전해지는 부분이었다. 영화『군중낙원』속 많은 ‘위안부’들은 그렇게 그려졌다. 평범하지만 각자의 다양한 사연 속에서 ‘831 부대’ 내 생활이 평화롭고 일상인 것 같은 모습을 하다가 영화 중간 중간 갑자기 그녀들의 고통스러운 진심을 꺼낸다.




영화가 끝난 후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여성 인권 관련 법원 판결로 군 공창 법은 폐지됐다. 그게 생긴 것도 사라진 것도 시대의 요구였을 뿐이다. 운명의 바다에 떠다니는 우리 모두를 위한 영화입니다.”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그게 생긴 것도 사라진 것도 시대의 요구였을 뿐이다. 운명의 바다에 떠다니는 우리 모두를 위한 영화. 그게 생긴 것도 사라진 것도, 군인들이 위안소를 찾은 것도, ‘위안부’가 ‘위안부’로 일하게 된 것도 시대의 요구였다. 그들은 시대에 저항하기에는 너무 작은 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와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그들이 우리였을 수도, 우리가 그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시대의 요구가 있다면 말이다. ‘시대의 요구’를 탓하며 죄를 미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군인들 개개인의 삶으로 본다면 시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피해자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용서할 수는 없다. 어디에 정착할지 모르는 운명의 바다에 떠다니는 우리가, 다시 이 끔찍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를 반성하고 잘못에 책임을 물어야한다. 또다시 아픈 이들이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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