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80,90년대 한국미술
현대미술에 대해선 솔직히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일까. 미술관에만 가면 마치 낯선 나라에 떨어진 외계인처럼 멍하니 작품들 앞에 서곤 했다.
“도대체 이 작가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왜 이렇게 어렵게, 일부러 복잡하게 표현했을까?”
이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작품 속 메시지는 안갯속 같았고, 직관적으로 와닿는 감동은커녕, ‘나만 모르는 건가’ 싶어 슬쩍 눈치를 보게 되기도 했다. 오랜 시간 작품 앞에 서 있어도, 그 의미는 여전히 난공불락. 결국 해답은 하나, 설명이 필요했다.
그런 나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도슨트 교육 프로그램.
작품을 조금 더 이해하게 도와주는 그 ‘설명해주는 사람들’, 도슨트가 되기 위한 수업이었다.
지원 과정부터 심상치 않았다. 단순한 신청서가 아니라, 자기소개는 기본, 지원동기까지 꼼꼼히 써야 했고, 최근 본 전시 중 하나를 골라 직접 도슨트 대본을 작성하는 과제까지 있었다.
꽤나 빡센 지원서였다…ㅜ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도 모르게 열정이 끓어올랐다.
공을 들여 지원서를 썼고, 몇 번이나 고쳐 썼고, 그리고—운 좋게도 합격 연락을 받았다.
첫날, 담당자가 말했다.
“이번 기수 경쟁률이 꽤 높았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지원하셨어요.”
솔직히, 그 말 반쯤은 의심했다. ‘아, 홍보 멘트겠지. 흔한 상투적인 말이잖아.’ 게다가 60명 정원이라는데, 정말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평일 오후 시간에 이 수업을 듣겠다고 지원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강의를 듣자, 내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알게 됐다.
수업은, 놀라웠다.
지루할 틈이 없었다.
강연자의 해석은 신선했고, 작품 뒤에 숨겨진 역사와 의도, 감정의 결까지 풀어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퍼즐이 맞춰지는 쾌감이었다. 2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고, 수업을 마치고 나서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다음 강의는 언제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그 설렘이 다시 떠오른다.
그날, 나는 알았다.
내가 예전에 멀뚱히 바라보던 그 ‘이해 안 되는 작품’ 안에, 이렇게 풍부한 생각과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구나.
이것이 바로 ‘눈이 뜨이는 경험’, 개안이었다. 계몽이었나

그래서 나는 지금, 그때의 감동을 기억하고 싶어 이 글을 쓴다.
너무 좋아서, 너무 소중해서, 오래오래 곱씹고 싶어서.
참고로, 현대미술에 과문한 교육생의 어설픈 정리글이기에 강연을 잘못이해한 부분이 많을 수 있다는 것.
1주차 교육 60, 70, 80, 90년대 한국의 현대미술 - 신정훈 교수(서울대 서양학과)
미술관에 들어서면, 언뜻 봐선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낯설고 기묘한 작품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마치 퍼즐 같고, 수수께끼 같은 이 작품들. 그 시작은 바로 1960년대, 격동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시장에선 이제껏 보지 못한 형태의 작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캔버스를 찢고, 오브제를 던지며, 때론 무대 위에서 몸을 던지는 퍼포먼스까지. ‘실험예술’이라 불린 이 새로운 흐름은, 그 이름 그대로 기존 예술의 틀을 깨려는 도전이었다.
전통 회화가 아름다움과 조화를 추구하며 ‘보이는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면, 실험예술은 완전히 다른 방향을 택했다. 직관적 이해? 그런 건 사치일 뿐. 한 번에 알아볼 수 없는 세계, 질문을 던지고, 당혹감을 주고, 보는 이를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 그것이 바로 이들의 예술이었다.
하지만 또다른 의미에서 대담한 시도가 있었다.
1960년대는 군부 독재 정권 아래, 말 한 마디조차 조심해야 했던 시절. 예술뿐만 아니라, 언론, 학문, 일상의 모든 것이 감시받았고 통제되었다.
거리에서는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경제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희생이 강요되던 시대.
그런 시대에, 예술가들은 고민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예술은 무엇인가?”
그 물음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민중예술이다.
실험예술이 현실의 부조리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면, 민중예술은 이를 직접적으로 외쳤다.
(현실동인이라는 모임을 통해 이들은 현실로부터 소외된 조형의 사회적 효력성을 회복하는 일을 시도함)
삶과 투쟁, 억압과 저항을 화폭에, 벽에, 거리의 현수막에 담았다.
그리고 그 외침은 60년대를 넘어, 70년대, 80년대까지 이어졌다.
예술은 더 이상 미(美)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 현대미술은, 미지와 격랑 속을 헤쳐 나가며 자신만의 목소리를 키워갔다.
모더니즘이라는 사조 아래, 작가들은 더 이상 눈앞의 형상이나 풍경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들은 묻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인가?"
이 시기, 한국 미술계에 등장한 단색화는 이런 질문의 결정체였다.
하얗거나 회색, 또는 가느다란 색의 반복 — 언뜻 보면 텅 빈 것 같은 화면.
그러나 그 속엔 화면을 밀고 당기며 물감을 쌓아올린 작가의 호흡, 시간, 존재의 흔적이 켜켜이 깃들어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단순한 양식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철학이 있었다 — 현상학.
단색계 미술은 “눈에 보이는 상”을 넘어서, 대상의 '실재'와 관객이 직접 만나게 하려는 시도였다. 관객은 더 이상 단순한 감상자가 아니라, 작품과의 직접적인 만남의 주체가 되어야 했다. 작품은 말하지 않았고, 관객은 침묵 속에서 그 의미를 '경험'해야 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미학은 곧 반론에 직면한다.
"이건 해석이 필요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잖아."
단색화는 때로 엘리트 예술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직관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 그 안에 담긴 철학과 구조를 ‘해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해석의 문턱은 결코 낮지 않았고, 미술관은 점점 지적인 담론의 성지처럼 변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예술은 단지 시각적 만족을 넘어 존재와 인식에 대한 깊은 성찰을 예술로 끌어올린 용기 있는 실험이었다.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잿빛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던 고속도로.
예술은 더 이상 고요한 미술관 속에서만 머무를 수 없었다.
작가들은 ‘움직일 수 있는 예술’을 꿈꿨고, 그에 걸맞은 매체로 테피스트리가 떠올랐다.
대형 직물 위에 수놓아진 민중을 표현한 작품들은
전시장을 넘어 광장, 거리, 대학 강의실까지 도시 곳곳으로 이동하며 설치되었다.
기동성과 공간 유연성을 지닌 테피스트리는 정지된 캔버스를 탈피하여 거리로 광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모더니즘은 꺼지지 않았다.
미세한 질감과 색채의 리듬으로 세상을 응시하던 그 시선은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자신만의 호흡을 유지하고 있었다.
1990년대로 들어서며, 한국 미술은 감각의 표면과 개념의 심층,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삼분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예술은 무겁고 비장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무너졌다.
화려한 색채, 낯선 형상, 가벼운 질감 — 이들은 겉보기에 경쾌했고,
때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이미지들로 관람자를 당혹스럽게 했다.
대표적 작가인 이불(Lee Bul)의 작품은
인체, 기계, 욕망, 젠더가 뒤섞인 혼성체로
감각적이되 결코 단순하지 않은 서사를 품었다.
미술은 더 이상 물감에 묶이지 않았다.
설치미술, 영상, 다큐멘터리, 사진, 오브제…
작가들은 ‘개념’을 중심으로, 매체를 해체하고 재조립했다.
일부 평론가는 이를 ‘청교도적 미술’이라 부르며,
깔끔하고 절제된 스타일 속의 고요한 메시지를 주목했다.
1990년대는 민주화 이후의 첫 안정을 맛본 시대였다.
시위의 함성은 잦아들었고, 거리의 붓은 더 이상 울분을 뿜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의 평온함 뒤에는 자본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예술조차 그것들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이에 일부 작가들은 대중과 거리를 두며, 예술의 자율성과 진실성을 다시 묻기 시작했다.
이들은 화려한 소비문화와는 다른 결을 선택했고,
‘반짝이지 않아도 진실한 것’을 조명하려 했다.
포스트 민중 미술이라 불리는 이 흐름은
자본의 유혹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조용한 저항이었다.